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4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포토세션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한 뒤 얘기 나누며 밝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제25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하 포럼)의 최대 관심사인 남북, 북-미 외교장관 사이의 공식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다만 남북은 ‘스탠딩 약식 회담’을, 북-미는 ‘(정상 간) 친서 외교’를 통해 교착 국면 속에서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번 포럼에서 북한은 지난해의 네배인 12개국과 양자회담을 하는 ‘광폭 외교’를 펼쳐 남북, 북-미 정상회담 뒤 달라진 정세를 실감케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만남은 3일 저녁 진행된 포럼 전야제 격인 ‘갈라 만찬’에서 성사됐다. 이 자리에서 리 외무상은 “외교장관 회담에 응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일(현지시각) 싱가포르 포럼 결산 기자회견에서 강 장관은 “(리 외무상이) 아직 외교 당국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면서도 구체적인 설명은 피했다. 6·12 정상회담 뒤 북-미가 공동성명 이행의 방법과 순서를 놓고 치열한 샅바싸움을 하는 와중이라 아직은 북쪽 외교 당국이 주도할 구체적 협상 국면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인식에 따른 행보로 풀이된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리 외무상과 강 장관은 여태까지 비핵화 협상의 주체가 아니었던 터라 공식 회담을 하는 데에 부담이 있었을 수 있다”고 짚었다.
북-미 간 ‘스탠딩 외교’는 4일 오후 회의장에서 이뤄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기념촬영 순서에서 리 외무상한테 다가가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했다. 성 김 주필리핀 대사가 리 외무상에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한테 보내는 친서를 건네는 장면도 언론에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친서는 김 위원장이 최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두번째 서신에 대한 답신이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트위터에 리 외무상과 “정중”하고 “짧은” 만남을 했다며 “우리 대표단이 김 위원장의 서한에 대한 답신을 전할 기회도 있었다”고 공개했다. 정식 양자회담은 없었지만, 미국은 ‘친서 외교’ 등 북한과 접촉 사실을 부각해 ‘대화 모멘텀’을 이어가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처음부터 톱다운 방식이었기 때문에 밑에서 (실무자들이) 삐걱거리더라도 지도자 수준의 신뢰는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답보를 거듭하고 있는 북-미 관계에 대해 미국은 포럼에서 대화의 문을 열어두면서도 대북 압박을 이어갔다. 폼페이오 장관은 4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낙관한다”면서도 “(이번 회의 기간)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북한 비핵화’(FFVD)를 이루기 위한 외교·경제적 대북 압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이번 포럼에서 북한의 적극적 외교전도 눈길을 끌었다. 리 외무상은 3~4일 중국·타이·베트남·라오스·인도네시아·미얀마·필리핀·유럽연합(EU)·뉴질랜드 등 모두 12개국과 양자회담을 했다. 중국, 러시아, 필리핀(의장국) 등 세 나라와만 양자회담을 한 지난해 포럼 때와 사뭇 대비된다. 이번 포럼 연설에서 ‘사회주의경제건설 총력 집중’ 전략노선의 실현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조선반도와 그 주변의 평화적 환경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 리 외무상은 관련 각국의 협력과 지원을 호소했으리라 추정된다.
이 밖에 포럼을 계기로 남-북-미-중은 종전선언 관련 논의도 했다. 강경화 장관은 “미국, 중국과 (종전선언에 대한) 상당한 협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김지은 기자,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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