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21일 오후 청와대에서 미국의 북핵 실무협상을 이끄는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와 만나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한국과 미국이 21일 한-미 워킹그룹 2차 회의를 열어 당면한 남북협력사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대북제재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민간단체들에 대한 대북 인도적 지원 허용을 시사한 발언에 뒤이은 것으로,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려 시동을 걸었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미국의 ‘작은’ 성의 표시에 북한이 호응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남북협력사업에 대한 제재 면제 절차가 완료되면 오는 26일 예정대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 착공식과 내년 초로 예정된 한국전쟁 전사자의 공동유해발굴 사업이 진행된다. 이날 회의에서 협의된 타미플루 제공 문제는 지난 12일 열린 남북 보건의료 실무회의에서 논의된 사안으로, 통일부는 “치료제인 타미플루와 신속진단키트를 북쪽에 제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비건 특별대표의 행보와 관련해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대북제재 면제 조치를 사안별로 확대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북-미 협상에 밝은 외교 소식통도 “그간 대북제재의 틀 내에서 (남북협력사업 등에) 시동을 거는 것조차 어려웠다”며 “(현재의) 교착을 타개하는 주체가 미국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미국 쪽의) 분명한 태도 변화”라고 덧붙였다.
미국 쪽의 이런 잇단 유화 신호는 북-미 2차 정상회담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실무 및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자는 대북 메시지로 풀이된다. 이는 비건 특별대표가 지난 19일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면서 대북 인도적 지원 허용 뜻을 시사한 것이 ‘폼페이오 장관의 지시’라고 강조한 데서도 드러난다. 대북 강경성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에 대한 북한 쪽의 ‘오해’를 풀고 싶어 하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비건 특별대표는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제재를 완화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신뢰 구축 조처는 검토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그는 “(후속 북-미 대화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다가올 정상회담에 대한 일부 구체적 사항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뢰 구축 조처를 준비하고 있으니 들어보라는 뜻이다. 다만, 이날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미국 쪽은 이를 둘러싼 구체적 설명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고려하는 ‘신뢰 구축 조처’는 앞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미국 <폭스 뉴스> 인터뷰 때 언급한 △종전선언 △인도적 지원 △예술단 교류 △경제시찰단 방문 △평양 연락사무소 설치 등일 것으로 보인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는 얘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사안들이 대북제재에 크게 저촉되지 않는 남북 사이 협력사업이고, 북한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근본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북-미 교착을 풀 원동력으로 작동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찮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선호하는 북한의 협상 방식과 ‘제재 완화는 없다’는 미국의 메시지에 비춰볼 때 북한이 북-미 고위급 회담에 나설지도 불확실하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미국이 한 얘기는 원론적인 수준의 제재 예외거나 (당연히 추진됐어야 할) 인도적 문제”라며 “최근 북쪽은 (북-미 조처 간) 비례성 얘기를 하거나, (북한은) 0.1㎜도 움직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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