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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강대국 지정학 벗어나 ‘한반도 평화 번영’ 갈구했던 조선족 학자

등록 2020-11-09 19:06수정 2020-11-10 02:36

진징이 중국 베이징대 교수 별세
2012년부터 8년간 ‘한겨레’ 칼럼
지난 4월 “당분간 집필중단” 편지
2019년 11월 한겨레부산포럼에서 발표자로 참가한 고 진징이 교수. 사진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2019년 11월 한겨레부산포럼에서 발표자로 참가한 고 진징이 교수. 사진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진징이(김경일) 중국 베이징대 교수가 지난 8일 베이징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

중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자 조선족 학자인 진 교수는 남북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연구와 활동을 해왔다. 2012년 6월부터 2020년 4월까지 8년 동안 <한겨레>의 ‘세계의 창’ 칼럼을 통해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고 북한의 변화 노력을 생생하게 전했다.

고인은 1953년 옌볜조선족자치주 돈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함경북도 출신이다. 옌볜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베이징대 조선문화연구소와 한반도연구중심(센터)를 맡아 많은 한반도 연구자와 외교관 등 제자들을 길러냈다. 한국과 깊은 교류를 통해 그는 한-중이 한반도 문제에서 이해와 접점을 넓힐 수 있도록 중요한 다리 구실을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등에서 방문연구원, 한국외교안보연구원의 <한국외교> 특약편집자 등으로 폭넒은 인연을 맺었다. 일본 게이오대 지역연구소 객원교수도 지냈다.

그는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지정학에서 벗어나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지경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밝혀왔다. 2012년 6월20일치 <한겨레>에 쓴 첫 칼럼 ‘한반도 통일과 중국’에서 “분단 현실이 강대국들에게 (한반도에) 개입할 빌미와 틈새를 제공하고 있다”라며, “한반도 통일은 바로 이러한 틈새를 메우는 작업인 것이다. 결국 한반도의 통일은 남북 분단을 극복한 통일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멍에와 강대국 전략의 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북한을 방문해 변화를 관찰했던 그는 김정은 시대 들어 북한이 민생 중심의 경제개혁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을 한국에 꾸준히 전하며, 그 변화의 싹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만나 뿌리 깊은 나무로 성장하길 염원했다.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설이 고조되던 2017년 10월9일치 칼럼 ‘북핵의 지경학적 해법’에서 그는 “북한은 미국을 백년숙적이라 하지만 누구보다도 미국과 관계 개선을 원한다. 경제발전을 꾀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 김정은 정권은 중앙에 집중됐던 권력을 지방에, 기업에, 개발구에, 농촌에 내려보내는 사실상의 개혁을 단행하면서 경제를 상승세로 이끌어왔다. 거기에 ‘시장경제’ 요소가 전국으로 확장되고 있다”면서, “한반도에 지경학적 요소가 차고 넘치면 북한의 핵 포기도 불가능이 아닐 수 있다”고 썼다.

지난 4월26일치 마지막 칼럼 ‘총선과 남북관계’를 통해 그는 “수십년 동안 한국 국내 정치를 컨트롤하는 ‘만능 보검’ 구실을 했던 반공 이데올로기가 시대의 버림을 받고 있다”면서, “남북관계에 새로운 기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희망을 밝혔다.

어린 시절 문학소년이었던 그는 꾸준히 한국어로 글을 썼다. 언젠가 자신이 겪은 현대사의 사건들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뜻도 밝힌 적이 있다. 여러 독자들이 그가 쓴 <한겨레> 칼럼의 중국어 원문을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를 해왔지만, 그는 모든 칼럼을 직접 한국어로 썼다. 그는 <한겨레>를 통해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는 것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자신의 병을 알게 된 뒤 지난 4월 말 그는 “고민고민하다 편지를 씁니다. ‘한겨레’ 원고는 며칠 전 발표한 것으로 당분간 필(붓)을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계속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며 독자들과의 재회를 기약했으나 그날은 오지 못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민희 논설위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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