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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도 하나회 쿠데타설…전두환 반란의 씨앗이 제거되기까지

등록 2023-11-28 11:51수정 2023-11-29 13:20

‘서울의 봄’ 짓밟은 육군 소장 전두환은 어떻게 쿠데타에 성공했나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 보안사령관(황정민) 모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 보안사령관(황정민) 모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서울의 봄’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1979년 12월12일 주도한 군사 반란을 다루고 있다. 12월12일 저녁부터 13일 새벽까지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와 이를 막으려는 진압군의 9시간 사투에 집중한 영화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육군 소장에 불과했던 전두환은 어떻게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은 ‘보안사령관’과 ‘하나회’란 키워드로 풀 수 있다. 1960년대부터 한국군 안에서는 쿠데타를 막기 위한 장치가 이중삼중으로 마련돼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자신이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쿠데타 재발을 막기 위한 안전 장치를 촘촘하게 만들어놓았다.

전두환이 사령관이었던 보안사의 핵심 임무가 대전복(對顚覆) 임무다. ‘뒤집어엎다’는 ‘전복’은 쿠데타를 말한다. 대전복 임무는 쉽게 말해 쿠데타를 막는 것이다.

보안사의 대전복 임무수행 개념은 전복 위협을 찾아서 제거하는 차원이 아니라 전복 징후를 포착해 사전에 이를 제거하거나, 전복 위협요소가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을 찾아서 이를 관리함으로써 위협요소 형성 자체를 방지하는 것이다. 보안사는 쿠데타 싹을 자르기 위해 주요 군 지휘관들의 공식·비공식 접촉 인물과 동향을 꼼꼼하게 챙긴다. 주요 군 지휘관들의 유·무선 통화도 24시간 감청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육군 1사단장을 하던 전두환은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됐다. 전두환 대위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장군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을 지내는 등 일찌감치 박정희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보안사의 쿠데타 예방 조처에도 불구하고 쿠데타가 일어나면 1979년 당시 서울 충무로에 주둔한 수도경비사령부나 서울 송파구 특수전사령부가 서울에 들어온 쿠데타군을 진압한다. 이들 부대를 대전복 임무 부대라고도 부른다.

이런 쿠데타 예방·진압 시스템은 1979년 12·12 때도 있었지만 신군부의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다. 쿠데타를 막아야 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쿠데타 ‘수괴’였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에서는 보안사가 군 통신망을 엿듣고 진압군의 움직임을 손 바닥 보듯 파악해 대응한다. 쿠데타를 막기 위해 보안사에 부여한 군 통신망 감청 권한을 신군부가 거꾸로 쿠데타에 악용한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었다.

대전복 부대 임무를 맡은 특전사와 수방사의 몇몇 지휘관들이 거꾸로 군사반란의 행동대장을 맡았다. 군사반란을 진압하려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하인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과 최세창 3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5공수특전여단장이 배신해 직속상관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1979년 12월12일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앞줄 왼쪽 다섯째)·노태우(넷째) 등 신군부 주축 세력은 이튿날 보안사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5공화국전사>
1979년 12월12일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앞줄 왼쪽 다섯째)·노태우(넷째) 등 신군부 주축 세력은 이튿날 보안사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5공화국전사>

이들이 정상적인 지휘계통과 임무를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란 사조직으로 탄탄하게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1963년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김복동 등 육사 11기생들의 주도로 군대 내의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한다. 1979년 12·12 당시 보안사, 특전사, 수경사 등의 주요 멤버가 하나회였다. 하나회는 원래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조직을 자임해 박 대통령의 비호하에 세력을 불렸다. 박 대통령과 하나회는 숙주와 기생 생물같은 관계였다. 19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이 숨지자, 기생 생물이던 하나회가 숙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하나회를 없애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은 취임 11일 만인 1993년 3월8일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고 하나회 숙정, 율곡 비리, 인사비리, 12·12 군사쿠데타 관련자 예편조치 등 마치 벼락이 내리치듯 하나회 관련 군인들을 정리했다. 이런 하나회 척결과정은 ‘깜짝쇼’란 빈정거림을 받기도 했지만 문민정부 관계자들은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반박한다.

“1979년 겨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내려는 계획이 새나가면서 12·12가 일어났다. 이 점을 김영삼 대통령은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임 초기 노태우 정부 때 임명된 군 장성 중에 김 대통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민정부가 하나회와 타협해 동거하지 않는다면 집권 초기 숨돌릴 틈 없이 칼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퇴임 뒤 1999년 8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하나회 정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했다고 밝히고, “이걸 안 했으면 문민정부도 없고 김대중 정부도 없었다. 쿠데타했을 게 뻔한데”라고 말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여름 정보기관·군·청와대 등에는 쿠데타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직으로 밀려난 일부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자금 마련과 병력 동원 등 역할을 나눠 쿠데타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회 쿠데타 모의설’이 퍼지자 정부는 쿠데타 주도 가능성이 있는 장성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전화를 감청하는 등 동향을 밀착 감시했고 쿠데타 자금줄을 캐기 위해 은행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결국 소문에 그쳤지만 쿠데타설은 1993년 연말까지 유령처럼 서울 하늘을 떠돌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정국이 불안해지면 군부의 개입 가능성이 튀어나오곤 했다. 이 무렵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군부가 한국 정치에서 가장 영향을 미치는 집단으로 꼽히곤 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원화됐고 성숙했다. 군이 주도적 역할을 할 상황은 지났다.

1996년 8월26일 12·12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수의를 입고 1심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전두환·노태우. &lt;한겨레&gt; 자료사진
1996년 8월26일 12·12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수의를 입고 1심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전두환·노태우. <한겨레> 자료사진

만의 하나 일부 정치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집권에 성공해도, 영구 집권을 할 수 없고 임기를 마친 뒤에는 처벌을 받게 된다. 김영삼 정부 때 검찰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국민 저항이 거세져 국회는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으며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기소가 이뤄졌다. 1997년 4월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이 선고됐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과거 하나회처럼 공식 지휘계통까지 어긴 채 주도면밀하게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할 만한 군내 사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민정부 이후 군에 대한 문민통제 원칙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문민통제는 국민이 선출한 정치권력(대통령)과 문민관료(국방장관)가 안보 정책을 주도·결정하고, 안보전문가 집단인 군은 군사작전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민주군대는 정치적인 중립을 전제로 군 본연의 임무에만 전념하는 안보 전문가 집단이다. ‘서울의 봄’은 민주군대와 쿠데타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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