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1월26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신임 수석비서관 및 특보단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박 대통령 옆에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만 양복 단추를 채우지 않아 화제가 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민정수석에서 ‘민정’에는, ‘백성 민(民)’자와 ‘뜻 정(情)’ 자가 쓰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민정을 ‘백성들의 사정과 형편’이라고 풀이했다. 현대인들이 자주 쓰지는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자주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말이다. 세종 실록을 보면 1427년 세종이 “의정부 사인 김종서를 황해도에 보내 새로 설치한 영강진의 민정이 편한가 편하지 않은가를 다시 살피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앙부처의 관리 김종서를 황해도 영강진에 보내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 문제점이 없는지 시찰하라는 얘기다.
유신 직전 등장한 민정수석실
청와대에 민정수석비서관실이라는 직제가 처음 생긴 건 유신 정권 직전인 1969년 3월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신설된 민정수석실의 업무로 “가감없는 민심 전달을 통한 올바른 국정운영 보좌, 제도개혁을 통한 참여민주주의 실현 보좌, 적재적소의 인사를 통한 효율적인 국정 보좌, 엄정한 감찰을 통한 투명한 사회건설 보좌, 명확한 법률적 검토와 신속한 법적 대응”을 꼽았다. 민정수석실의 주요 업무는 박정희 정권 때 확립된 셈이다. 초대 민정수석은 정치인 출신 유승원씨가 맡았지만 후임자는 경호실 차장을 역임한 군 출신 김시진씨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업무의 주요한 두 축은 민정과 사정(司正)이다. 민심을 파악하는 것에 더해 강제력을 가진 사정기관을 활용해 대통령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 들어서는 사정수석실을 신설해 그 기능을 강화했다. 초대 사정수석은 전두환의 신군부 핵심참모였던 허삼수씨였고 초대 민정수석은 역시 신군부 핵심인 이학봉씨였다. 권력의 원천이 군부라는 점을 보여주는 인사였다.
노태우 정권은 민정·사정수석실을 민정수석실 하나로 다시 통합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검찰 고위직이 민정수석 자리를 꿰차게 된다. 대통령 보좌권력의 중심이 군에서 검찰로 넘어간 것이다. 초대 민정수석은 대검 중앙수사부장을 거친 한영석 법무부 차관이었다. 한 수석은 1년 뒤 서울고검장으로 영전했다. 정구영 광주고검장이 후임으로 왔는데 민정수석으로 1년 동안 근무한 뒤 검찰의 총수인 검찰총장이 됐다. 정권과 검찰의 강한 유착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진 시기였다.
국민의정부도 이겨내지 못한 ‘민정의 달콤함’
2001년 11월5일, 옷로비 사건과 관련해 공무상 비밀누설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박주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서초동 서울지법에서 선고가 끝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김영삼 정권에서는 공안검사 출신으로 국정원 1차장을 지낸 김영수씨와 지검장 출신 문종수씨가 민정수석에 기용됐다. 검찰과 군, 국정원 출신 인사들이 민심을 청취하는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고 문제가 있는 곳에 칼을 휘두르는 손과 발이 된 것이다.
사정기관을 정권의 통치 도구로 활용하는 행태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민정수석실을 폐지했다. 그 대신 민정비서관과 법무비서관을 비서실장 밑으로 넣어 힘을 뺐다. 법무비서관은 사정기관을 통제하던 사정비서관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대검 수사기획관에서 발탁된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국가기강확립대책 실무협의회를 주재하는 등 사정기관의 컨트롤 타워로서의 힘은 여전했다. 박 비서관은 경찰청 조사팀의 옷로비 의혹 내사 보고서를 의혹의 당사자인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넘겼다가 기소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민정수석실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 중반인 1999년 6월 부활됐다. “청와대의 민의수렴 기능을 강화해달라”는 재야·시민단체 대표들의 건의를 수용한 형태였다. 그로부터 6개월 뒤에는 비서실장 밑에 있던 법무비서관을 사정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민정수석실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신광옥 대검 중수부장을 새 민정수석으로 임명했다. 현직에 있는 검찰 고위간부를 민정수석으로 기용해, 검찰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6공화국 이전의 형태로 돌아간 것이다.
참여정부 민정수석실, 검찰과 다리를 끊고…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2007년 3월6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법조브로커 윤상림과 관련한 사정비서관실의 첩보 처리 경과를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문 수석은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을 두 차례나 맡고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까지 역임해 ‘왕수석’으로 통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기관을 통치 도구로 활용하려는 악습을 끊으려 했다. 그래서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검찰 출신이 아닌 문재인 변호사를 기용했다. 문재인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을 보면 “나 같은 사람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함으로써, 검찰을 장악할 의사가 없다는 대통령 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하고자 한 것”이라고 회고한다. 참여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국민의정부 마지막 민정수석이었던 이재신 변호사는 “민정수석실 업무의 80%가 대 검찰 업무다. 민정수석과 민정비서관은 검찰 출신이 바람직하다. 수석이 검찰 출신이 아니면 비서관이라도 검찰 출신으로 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문재인 민정수석은 노 대통령의 측근 참모인 이호철씨를 민정1비서관으로기용했다. 민정2비서관은 판사 출신 박범계 변호사였고 인사검증을 맡는 공직기강비서관은 민변 소속 이석태 변호사였다.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고 고위공직자와 청와대 내부 감찰을 맡는 사정비서관에는 1996년에 검찰에서 부부장검사로 퇴직한 양인석 변호사였다. 당시 신계륜 당선인 비서실장은 “그 중요한 자리에 왜 우리 쪽 사람을 안 쓰냐”고 반발했다. 문재인 전 민정수석은 “요즘 와서 생각하면,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정에도 코드가 필요하다는 생각, 그것이 현실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다”고 적었다. 문재인 민정수석은 취임 뒤 민정수석실에 설치돼있던 검찰과의 직통전화를 끊었다. 청와대 업무차량이 부족해 관행적으로 당겨써오던 검찰의 관용차도 검찰청으로 돌려보냈다. 검찰과의 비공식 루트를 모두 끊어버린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복원된 밀월 관계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이종찬·정동기·권재진 등 고검장 출신 변호사들을 민정수석으로 기용했다. 검찰 현직에서 바로온 민정수석은 아니었지만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과 기수 차이가 꽤 나는 검찰 선배들은 검찰을 통제하는 데 용이했다. 미네르바·피디수첩·정연주 사건에서 보듯 정권을 비판하는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제거하는 데 검찰을 손쉽게 동원했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수사를 진행한 검사에게는 좋은 보직으로 보상했다. 백정이 되겠다고 자처한 칼잡이들이 줄을 섰다. 대통령의 검찰 인사권은 이들을 줄 세우는 데 아주 손쉬운 무기였다. 민정수석은 대통령의 법무참로서 검사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근혜 정권도 다를 게 없었다. 홍경식·김영한 민정수석 등은 존재감 없이 사라졌지만 김기춘 비서실장의 권한을 양위받은 우병우 수석은 검찰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박근혜 정권 보위를 위한 최전선에 서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