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가 24일 오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새 정부 출범 후 임명된 차관급 공직자 16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기 위해 행사장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은 4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직자에게는 5대 의무가 있습니다.”
24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관세청장 등 차관급 공직자 16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꺼낸 ‘5대 의무’라는 말에 참석자들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이 총리는 “국방·근로·교육·납세의 의무 외에 ‘설명의 의무’가 있다. 그걸 충실히 못 하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이 총리의 발언 의도는 이어지는 말에서 드러났다.
“이번 (살충제) 계란 파동도 관리 책임을 충분히 못 했다는 것 못지않게 설명의 의무를 적절히 못 했다는 것이 더 많은 질책을 받고 있지요. 이것은 짜증이 아니라 질책입니다.” (참석자들 웃음)
이는 류영진 식품의약안전처장이 22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회의에서 “총리께서 짜증을 냈다”고 발언한 것을 겨냥한 것이다. 이 총리는 지난 17일 국정현안점검조정 회의에서 류 처장이 ‘살충제 달걀’과 관련한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이런 질문은 국민이 할 수도 있고 브리핑에서 기자들이 할 수도 있다. 제대로 답변 못 할 거면 기자들에게 브리핑하지 말라”고 질책했는데, 류 처장은 이를 ‘짜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는 “설명의 의무를 다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며 류 처장의 최근 국회 발언을 사례로 들면서 ‘설명의 의무’에 관한 ‘깨알 강의’를 이어갔다.
◎사회적 감수성
“국민들이 뭘 궁금해하고 뭘 불안해하고 뭘 못 믿으실까…기관마다 다 다를 거예요. 기관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요. 기관마다 국민들이 쉽게 분노하는 분야도 있을 거예요. (중략) 어떻게 설명해야 국민들을 덜 분노하게 할 것인가, 국민들의 불신이나 의심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시킬 것인가, 그걸 누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금방 아실 수 있어야 됩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아셔야 되는 것이죠. 그걸 저는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딘 분은 정말 어려운 분야가 공직 분야죠”
◎정성과 정량
“정성적 접근과 정량적 접근을 배합해야 돼요. 그것이 안 되면 정량이 없는 정성만의 접근은 공허하기 쉽고요. 정성이 없는 정량만의 접근은 딱딱하거나 설득력이 약해지지요. 이번 계란 파동을 예로 들어서,
여기 안 오신 어떤 분한테 미안한데, “계란 잡숴도 괜찮습니다”, 심지어는 “하루에 2.6개씩 죽을 때까지 먹어도 괜찮습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어떤 계란을 그렇게 먹어도 괜찮다는 것인지(중략) 그렇다면 왜 전량폐기합니까. 그 다음부터 설명이 막히는 거죠?”
“그러면 예를 들어서, 이런 게 있다면 이렇게 설명하는 게 좋죠. ‘국민 한 분 한 분마다 가장 건강 상태가 좋았을 때의 상태가 똑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개개인에게 가장 정상적인 바람직한 건강 상태를 100이라고 보고, 현장에서 즉시 사망할 정도를 0이라고 친다면, 0.1을 넘지 않는 영향을 주는 것을 저희들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 0.1마저도 0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노력할 겁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더 알기 쉬울 거예요.”
◎준비
“세 번째가 준비인데요. 어떤 질문이 나올 것이다, 하는 것이죠. 사회적 감수성으로 당연히 알아야지요.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하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 준비가 갖춰져야 기자들한테 나설 수 있는 것이거든요.”
이 총리는 ‘강의’를 끝낸 뒤 이날 임명장을 받은 오동호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에게 “국민 앞에 나설 때는 어떻게 말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공무원교육 커리큘럼에 추가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적폐청산’이란 용어도 ‘오래된 숙제’라는 표현으로 바꿔 불렀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밝혔다. 이 총리는 “여러분이 맡으신 기관마다 오래된 숙제들이 있을 거예요. 제가 말씀 안 드려도 다 아실 거고. 여러분 재임 중에 그 숙제들이 ‘완벽하게 해결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철없는 사람이죠. 그러나 도전은 해주셔야 된다. 시작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적폐청산’ 그러면 좀 공격적인 느낌도 들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피해 의식을 가지는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느낌을 줄 텐데, 그래서 제가 ‘오래된 숙제’라는 표현으로 바꿨습니다. 그걸 해주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처럼 국무총리가 차관급 임명장 수여식을 한 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이후 처음이다. 그동안 각 부처의 장관은 물론 차관 임명장 수여도 대통령이 했다. 이 총리는 문 대통령이 임명장을 수여할 때처럼 이날 공직자들의 배우자도 총리 공관으로 초청했다. 총리실은 “국무총리의 역할을 중요시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이 총리는 “왜 똑같은 차관급인데 누구는 대통령께서 임명장을 주시고 누구는 안 그런가. 운이죠. 그런 게”라며 “초기에는 상징적으로 대통령께서 임명장을 수여하시고 터를 닦아놓았으니 그다음에는 총리가 일상적인 일을 한다고 생각해달라. 순전히 본인의 관운이다”라고 말해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 총리가 이날 임명장을 수여한 공직자는 김영문 관세청장, 박춘섭 조달청장,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김재현 산림청장, 성윤모 특허청장, 최수규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감사원 왕정홍 사무총장과 김진국 감사위원, 방송통신위원회 허욱·표철수 상임위원,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오동호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조병제 국립외교원장,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등이다. 류영진 식약처장은 오는 29일 임명장을 받을 예정이다.
이승준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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