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명의 국회의원 중 252명은 지역구를 두고 있습니다. 지역구 의원에게 지역 여론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초선 의원의 경우 지역에서 제대로 한 번 기반을 잡으면 재선, 3선 당선이 훨씬 수월해지는데요. 소속 정당, 추구 이념에 따라 때론 잔인하게 ‘물고 뜯는’ 국회의원들이지만 지역구 이슈에선 당과 별개로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 국회는 국정감사를 거쳐 지역 예산 등이 걸린 예산 심사 국면에 돌입했는데요. ‘당도 이기는 하나됨’을 보다 자주 볼 수 있는 시즌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정현까지 뭉치게 한 호남 KTX
어제(31일) 국회 식당에선 희한한 조합의 조찬 모임이 진행됐습니다. 민주평화당 정동영·박지원·장병완·유성엽·황주홍·최경환·김경진·정인화·이용주 의원과 바른미래당 김관영·주승용·김동철·정운천 의원, 더불어민주당 송갑석 의원에 무소속 이정현·이용호 의원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인데요. 당이 아닌 지역구를 보면 이해가 되는 조합입니다. 호남 의원들인 이들은 “호남 케이티엑스( KTX)에 단거리 노선을 신설하자”는 목소리를 함께 내기 위해 이번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현재 호남 케이티엑스 노선은 충북 청주 오송역을 우회하고 있어, 호남 지역민들의 입장에서는 접근성과 비용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게 이들의 분석인데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역을 신설하고, 이 역을 지나가는 ‘직선 호남 케이티엑스’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세종역 신설의 경우 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목소리를 내며 주목을 받게 됐던 이슈인데요. 잘 아시다시피 이 의원의 지역구가 충남 세종시입니다. 충남 세종의 숙원사업과 호남의 바람이 절묘하게 교차되면서 여러 당을 초월한 협업이 시작된 것인데요. 이름은 ‘세종 경유 호남선 케이티엑스 직선화 추진 의원모임’을 줄여 ‘세호추’로 정했습니다.
여기엔 자유한국당 출신이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 뒤 잠행하고 있는 이정현 의원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 시선을 모았는데요. 이 의원의 지역구는 전남 순천이죠. 이 의원과 함께 보수 정당 출신으로 호남에 입성해 화제가 됐던 정운천 의원(전북 전주을)도 이 모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싸우고 갈라진 의원들도 ‘새만금’ 앞에선 대동단결
호남 의원들은 요즘 좀 바빴는데요. 지난 30일에는 전북 군산 새만금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반발하는 성명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민주평화당 정동영·조배숙·유성엽·김광수·김종회 의원에 바른미래당 김관영·정운천·박주현 의원이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요. 무소속 이용호 의원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들 가운데 자유한국당 출신의 정운천 의원을 제외하곤 모두 국민의당 출신입니다. 2016년 4월 총선에서 ‘녹색바람’을 타고 국민의당 출마자들이 호남에서 대거 당선됐는데요. 지난 2월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통합될 때 일부는 민주평화당으로, 나머지는 바른미래당으로, 그리고 소수는 무소속으로 제 갈 길을 가게 됐습니다. 서로 비판하며 참 많이도 싸웠죠. 통합 막바지엔 양 쪽 관계자들 사이에 몸싸움까지 발생할 정도였는데요. 그런데 전북 최대 개발 현안인 새만금과 관련해선 하나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지역 개발과는 다른 이슈입니다만, 호남 의원들은 지난 31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의 조속한 출범을 위한 기자회견도 국회에서 열었는데요. 여기엔 민주평화당과 바른미래당 호남 의원들 다수에, 광주에서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인 송갑석 의원이 동참했습니다. 반면 보수 정당 출신의 호남 의원들은 여기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31일 호남 지역구 의원들이 `세종역 포함 호남 KTX 단거리 노선 신설' 논의를 위해 국회에서 조찬 모임을 갖고 있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 페이스북
자, 호남 의원들만 움직일리는 없죠. 케이티엑스 세종역이 신설되고 호남선 단선화가 진행될 경우 충북에는 피해가 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옵니다. 충북 오송역 이용객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30일 충북 의원들이 조찬 회동을 가졌습니다. 민주당의 변재일·오제세·이후삼 의원과, 자유한국당의 정우택·박덕흠·경대수 의원이 머리를 맞댔고요. 지역구 의원은 아니지만 충북을 고향으로 둔 비례대표 김수민(바른미래당), 김종대(정의당) 의원도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비례대표의 경우 ‘재선’ 출마를 출신 지역에서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들은 케이티엑스 세종역 신설 저지와 충북 지역 정부 예산 확보 확대를 위해 초당적 협력을 하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각종 법안에서보단 지역구 이슈에서 ‘초당적’이라는 단어가 더 수월하게 작동하는 모양새입니다.
‘보수텃밭’ 무너진 PK, 쪼개진 호남…복잡해진 방정식
과거 양당제 체제에서는 호남은 민주당 계열, 영남은 한국당 계열로 나뉘어 논의가 진행되곤 했는데요. 그만큼 지역별로 뭉치기도 쉽고 전선도 단순했습니다. 지금은 좀 복잡합니다. 보수 정당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피케이(PK) 지역에 민주당 의원이 여럿 진출해있고요. 민주당 텃밭이던 호남(28석)은 민주평화당 14석, 바른미래당 6석, 민주당 5석, 무소속 3석으로 쪼개져 있지요. 그만큼 지역별 ‘물 밑’ 논의가 전보다 다층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요. 여기에 정계개편 가능성까지 얽힌다면, 물 밑 논의는 그야말로 ‘고차방정식’이 되겠지요.
이런 측면에서 ‘보수 텃밭’ 대구(12석)도 관심을 받는데요. 한국당이 7석으로 여전히 다수지만, 민주당 2석, 바른미래당 1석, 대한애국당 1석, 무소속 1석 등 예전보다 다양하게 구성돼 있습니다. 한국당 의원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예산 국면에서도 ‘티케이(TK) 홀대론’을 내세우려고 벼르고 있는데요. 31일 한국당 티케이 의원들은 모임을 열어 티케이 홀대론 등에 대해 공감대를 확인했습니다. 민주당은 2석에 불과하지만 한 명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라 구심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김 장관은 티케이 홀대론에 맞서 정부 예산안의 적절성을 설파하면서도 대구 지역구민을 살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바른미래당 1석은, 야권 재편의 주요 축으로 평가되는 유승민 의원 몫이죠. 한국당 중심의 ‘티케이 홀대론’ 속에서 유 의원은 어떤 스탠스를 취할까요?
개별 의원들의 고차방정식 속에서 대구를 비롯한 전국의 내년도 예산안이 어떻게 확정될지 궁금해집니다. 아, 그리고 케이티엑스 세종역은 ‘세호추’의 바람대로 언젠가 신설될 수 있을까요?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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