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개방 첫날인 10일 많은 시민들이 경내에 들어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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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새 대통령이 5년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 삼청동 주민들의 환영 속에 청와대로 들어오는 행렬은 이제 멈췄다. 2022년 5월10일,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의 방탄차량은 청와대가 아닌 여전히 공사 중인 용산 국방부 청사 새 집무실로 향했다. 그 빈자리 26만㎡(7만8650평)의 공간엔 2만여명의 시민이 북새통을 이뤘다.
“봄꽃이 지기 전에 국민에게 청와대를 돌려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역대 대통령들이 국민 소통을 위해 벗어나려 했던 구중궁궐을 박차고 나온 결단을 추어올리는 이들, 속도전식 집무실 이전에 마음이 편치 않은 이들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결정이라고 결론 내는 건 현재로선 섣부를 수 있다.
청와대에 처음 입장한 국민대표 74명이 들고 간 꽃을 두고 귀신 쫓는 벽사행위라는 논란이 이는 것은 청와대 개방을 대하는 양가감정의 상징적 단면이다. 윤 대통령 부부가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이유를 무속에서 찾는 이들에겐 봄에 청와대를 시민 품으로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는 의미로 매화꽃을 들었다는 문화재청의 설명보다 귀신을 쫓기 위해 복숭아꽃을 들었다는 얘기가 더 솔깃하다.
문화재청 주관으로 진행된 ‘국민 품으로’ 행사에 따라 칠궁 앞 시화문, 영빈관 앞 영빈문, 대통령이 출입하던 정문, 기자들이 드나들던 춘추문 등 4곳을 통해 밀려든 시민들은 5만여 그루의 수목이 들어찬 청와대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감회를 발화한다.
“텔레비전에서 보니 74년 만의 개방이라는데, 경복궁 궁궐보다 더 좋다. 권력자만 누리던 이런 곳을 누구나 올 수 있게 만들어준 윤 대통령이 고마울 뿐이다.” 경기도 수원에서 왔다는 김수영(78)씨는 최고의 정원이라는 녹지원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며 74년 만의 환원에 의미를 부여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 경무대가 들어선 때부터 역산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총독관저(1939년)가 세워지고,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 2년3개월 동안 관저로 사용한 것까지 고려하면 그 시간은 한참 뒤로 물려야 할 것이다. 고려 숙종 9년(1104년) 왕의 별궁이 건립되고, 조선 시대 경복궁 후원으로 사용하며 왕이 직접 농사를 짓던 논이 있던 곳이라는 역사적 연원까지 따져 들면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청와대가 시민의 품에 돌아온 건 의미가 남다르다.
다른 목소리도 있다. 관저 마당에서 만난 문성진(22)씨는 청와대를 보려고 대전에서 왔다고 했다. “역사적 장소에 들어온 건 신기하다. 공원 같아 놀기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래도 옮기는 건 비효율이다. 돈, 보안 다 문제인데 왜 청와대를 떠났는지, 여기서 생활하면서 국민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택할 수 없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청와대 본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던 박길열(70)씨는 “국민이 대통령이 머물라고 지어준 이 좋은 집을 버리고 왜 군인들까지 쫓아내며 국방부로 들어가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을 위한 정원이 생긴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그토록 서둘러 국방부 청사로 집무실을 이전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방 첫날 2시간 단위로 6500명씩, 이날 하루 2만6천여명의 시민이 경내로 밀려들었지만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 앞과 대통령의 생활공간인 관저 마당을 제외하면 공간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구중궁궐의 상징인 관저 마당은 물론 청와대 경내 모든 산책로 등 금단의 영역이 활짝 열린 덕에 시민들은 적절히 분산됐다. 하지만 용산 국방부 청사로 집무실을 이전한 것만큼이나 급작스러운 개문발차식 청와대 개방은 7만8천여평의 드넓은 공간을 제대로 느끼고 즐기기엔 한계도 분명했다.
해설사는 없었다. 안내 표시판도 거의 없다. 청와대 주요 시설물 약도가 그려진 종이 한장에 의지해 보물찾기 하듯 스스로 탐방해야 한다. 경호처는 떠나고 개방행사를 위해 일시 잔류한 경찰 등 진행 요원들이 길을 가르쳐줄 뿐이다. 무엇보다 청와대 본관과 관저,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진이 함께 일하던 여민관, 국빈 만찬 등 연회가 열린 영빈관 등 시설물 내부를 전혀 공개하지 않은 것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날 저녁 개방행사를 위한 배려로 서둘러 마지막 퇴근을 했다지만, 물리적 준비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촌극이 빚어진다. 청와대의 가장 내밀한 공간,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 10월 완공한 대통령 관저의 솟을대문 인수문은 활짝 열렸다. 하지만 마당을 자유롭게 오갈 뿐 대통령 가족이 머문 본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굳게 닫혔다. 곳곳에 출입을 금지하는 경계선이 설치됐고, 경찰들이 “올라가시면 안 돼요”라고 호소하지만 그 선은 속절없이 무시당한다. 대통령의 은밀한 살림을 보려는 이들의 욕망을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대통령이 머물던 방은 커튼으로 가려졌다. 수행원들 대기 장소 등 응접 공간이라도 보려는 이들은 창문에 눈을 바짝 붙여댄다. “저 소파 좋은 건가? 일부러 저렇게 낡아 보이게 만든 거 아니냐?” “글쎄, 이사하면서 싹 가져갔대요. 가져가서는 안 되는 것도 다 가져가 문을 못 연대요.” 터무니 없는 억측이 떠돈다. 영빈관, 본관, 여민관, 춘추관 등은 사진 몇장 찍는 배경일 뿐이다. 본관과 관저 사이에 있는 의무동은 애써 수소문하지 않으면 그 이름조차 알기 어렵다. 특히 청와대 본관조차 내부를 전혀 들여다볼 수도 없게 한 건 국민 품으로 돌려준 청와대 개방의 의미를 크게 퇴색하게 했다. 본관 2층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구매한 전혁림 화백의 <통영항> 등 걸작 그림과 빼어난 전통 가구들이 즐비하고, 내외빈 접견 등 사실상 대한민국의 역사가 쓰인 곳이다.
“레드 카펫 밟을 수 있나요?” 그러나 이날 많은 시민들이 15만장의 구운 기와가 푸른빛을 뿜어내는 본관 팔작지붕 앞에서 멈춰서야 했다. 문재인,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등 대통령들이 거닐었던 본관 카펫, 너무 드넓어 이곳에 들어온 장관들조차 허둥댔다는 2층 대통령 집무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시민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언제 건물 내부를 개방할지도 불투명하다. 자료 정리 등을 마치면 개방할 것이라는 전망, 역사적 공간의 훼손 등을 우려해 쉽게 문을 열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이 공존한다. 대통령실은 22일까지 계획했던 청와대 시범개방을 6월11일까지 연장하겠다고 12일 밝혔다. 하루 3만9천명씩 청와대 관람을 허용하는데 12일 0시 현재 신청자가 231만명을 넘어 포화상태에 이르자, 추가 접수를 해서 청와대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국민 요구에 부응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 청와대 관리의 주체, 개방의 폭과 내용, 형식 등에 대해선 아직 구체적 방침을 내놓지 않고 있다. 시범개방을 주관한 문화재청이 관리의 주체가 되어 안내 표지 등을 정비한 뒤 공개하는 절차가 진행될 것이란 얘기도 나오지만 이 또한 확실치 않다. 박정섭 문화재청 대변인은 “청와대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방안도 있지만 공식 확정된 건 아니다. 본관 등 건물 내부 공개도 아직 방침이 없다”고 말했다.
일단 시범개방 기간 동안 청와대를 찾는 이들 스스로 충분히 즐길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이들이 손꼽는 청와대의 매력은 1983년 200년 이상 된 금강송으로 지은 한옥 상춘재와 그에 딸린 정원 녹지원에서 느낄 수 있다. 최고의 정원으로 불리는 만큼 이 일대는 수목의 보고다. 김영삼 대통령이 조깅 코스로 썼던 넓은 잔디밭 한쪽엔 수령 176살 높이 15m 규모의 반송 1그루와 149살 된 적송 4그루가 떡 버티고 위용을 자랑한다. 상춘재를 마주 보고 왼편을 흐르는 개울 위로는 백악교, 용충교 등 3개의 석조 다리가 있다. 백악교와 용충교 위아래에 조성된 소(沼)에는 물고기가 유영한다. 굳게 닫힌 청와대의 신비감을 더해 시중에는 이곳 물고기들이 너무 살이 쪘고, 비둘기가 그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 얘기가 나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라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팔자 좋은 물고기다. 봄, 여름, 가을을 이곳에서 노닐다 겨울이면 내수면연구소로 옮겨 보호받고 봄에 다시 방류된다. 수심이 낮아 겨울을 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춘재에 이어 침류각과 오운정을 살피면 청와대 안 한옥 기행이 된다. 침류각은 조선 시대 경복궁 후원에 연회장으로 지은 한옥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 103호, 오운정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세운 것으로 청와대 안 유일한 정자다.
청와대의 상징인 본관은 너무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1991년 완공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다. 일부 건축가들은 최악의 근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한다. 본관 터는 공사 중 300~400년 전 해서체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최고 명당)라고 새긴 120㎝ 높이 화강암 표석이 출토돼 명당으로 공인된 곳이다. 본관을 마주 보고 오른편 별채 옆 소나무를 좀 눈여겨봐야 한다. 언뜻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듯하지만 옛 우물처럼 돌담을 쌓아 올린 5m 깊이 땅속 한 몸에서 분기한 것이다. 본관을 지을 때 그만큼 흙을 다져 올린 흔적이다. 이곳에 있던 소나무를 그 높이까지 덮으면 고사하기 때문에 이런 보호책을 마련한 것이다.
대정원을 마주하고 오른편에는 소정원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때인 2009년 조성됐고,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초반 임종석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등과 함께 아메리카노 회동을 한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흉내 내 봄 직하지만, 현재 청와대 경내에선 커피는 물론 어떤 식음료도 판매하지 않는다.
소정원 바로 옆엔 옛 총독관저,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경무대가 자리잡았던 수궁터가 있다. 그 한쪽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기념식수 나무가 있고 그 옆쪽엔 좀 왜소하고 앙상한 주목이 있다. 대부분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수령이 무려 740년이 넘었다. 5만여 그루 청와대 수목 중에 가장 어르신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총독관저로 쓰인 경무대 본관을 헐 때도 이 주목은 그대로 살릴 만큼 귀하게 여긴 것이다.
청와대 수궁터의 수령 740년이 넘은 주목. 공동취재사진
대통령 관저는 앞쪽보다 뒤쪽 처마 라인이 운치 있고 고즈넉하니 아름답다. 관저를 마주 보며 왼쪽 계단을 조금 오르면 청와대 경내 최고의 뷰포인트가 펼쳐진다. 관저를 경호하는 경비 막사 형태의 그늘막이다. 광화문, 세종대로가 막힘없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조금 더 오르면 미남불이 있다. 신라 시대 석불좌상으로 보물 1977호지만 청와대에 존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곳에 이르는 아무런 표지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적당히 오르다 오른쪽 샛길로 빠져야 한다. 이곳에서 몇 발짝 더 옮겨가면 오운정이 펼쳐진다. 이 정도면 청와대 관람은 얼추 끝난다.
통일신라 불상인 석조여래좌상. 1989년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공동취재사진
호젓함을 맛보려면 영빈관에서 본관 옆으로 난 경내 산책로(성곽로)를 한 바퀴 돌면 된다. 청와대 경내와 경비부대가 주둔했던 외부를 구분하는 기와 돌담을 따라 춘추관 뒤편까지 이어진 1.5㎞를 40분 정도 오르내리면서 인왕산, 북악산은 물론 청와대의 숨은 속살을 볼 수 있다. 2018년 3차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선물받은 풍산개 한 쌍과 그 새끼들을 키우던 사육장(현재는 비어 있다), 토끼장(현재 굴토끼가 살고 있다)은 물론 산책로 따라 펼쳐진 오죽, 황철쭉, 매발톱꽃, 작약 군락 등 수많은 꽃을 볼 수 있다.
청와대 관저 뒷산에서 바라본 광화문 전경. 공동취재사진
상춘재, 수궁터, 관저 솟을대문 앞 등 곳곳에 산개한 대통령 기념식수 나무를 찾는 것도 재미를 더할 것이다. 김대중(느티나무) 노무현(서어나무) 문재인(은행나무), 세 대통령의 기념식수 나무가 한데 운집한 것을 확인하려면 청와대 관저 뒤 백악정까지 올라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구중궁궐의 답답함을 달래려 이곳을 통해 북악산에 올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보며 ‘아침이슬’을 듣고 민심의 무서움을 깨달았다고 밝힌 곳이기도 하다.
국민적 반대 속에 시작한 청계천 복원이 업적으로 추앙받듯 시간은 청와대 개방을 올바른 결단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도 있지만, 너무 서둘러 국민 품으로 돌려준 청와대가 국민 앞에 온전히 다가오려면 갖추고 정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청와대 관람을 위해 음식물과 간식 등을 챙겨 가는 것을 권장한다. 2시간 관람을 권장하지만 아무도 중간에 나가라고 하지 않는다. 음식물을 판매하지 않고, 쓰레기통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 배고픔과 목마름만 해결하면 온 종일 여유있게 완상할 수 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등 왕을 낳았으나 정비가 아닌 후궁을 모신 칠궁과 무궁화동산은 덤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궁정동 안가가 있던 자리를 공원화한 무궁화동산에선 ‘그때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 의미를 새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