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군 전술핵운용부대 등의 군사훈련을 지도하며 “적들과 대화할 내용도 없고 또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9일까지 인민군 전술핵운용부대·장거리포병부대·공군비행대의 훈련에 참석한 자리에서 이 같이 말했다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10일 밝혔다. 당시 북한군 훈련 장면.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4일 새벽 서해 북방한계선(NLL·엔엘엘)에서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벌어졌다. 북한 상선이 엔엘엘을 넘어와 남북이 경고사격을 주고받았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공군 전투기가 출격했다. 북의 7차 핵실험 관측이 높아지는 가운데 남북 ‘화약고’인 엔엘엘이 다시 위태로워졌다.
이날 오전 3시42분께, 서해 백령도 서북쪽 약 27㎞에서 북한 상선(무포호·5000t급) 1척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왔다. 합동참모본부(합참)는 “경고통신 및 경고사격을 통해 퇴거 조처했다”고 밝혔다. 이날 북한 선박은 약 40분간 엔엘엘 이남 3.3㎞까지 넘어왔다. 군당국은 북한 상선에 1차 경고통신, 2차 경고통신을 20차례 한 뒤 북한 상선이 항로를 변경하지 않자, 선박 진행 방향 앞쪽에 엠60(M60) 기관총으로 20발 경고사격을 했다. 이후 북한 선박은 오전 4시20분께 엔엘엘 이북으로 북상해 중국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새벽에 북한 상선이 엔엘엘을 넘어오자 군당국은 해군 호위함을 포함한 함정 수척과 우발 상황에 대비한 공군 케이에프(KF)-16 등 초계전력 및 해병대 등을 동원해 대응에 나섰다. 해군 함정은 북한 상선 1㎞ 거리까지 근접했으며, 북한은 ‘북측 해역에 접근하지 말라’는 취지의 통신을 발신했다.
북한 선박이 엔엘엘 북쪽으로 올라간 뒤인 새벽 5시14분께 북한군은 황해남도 장산곶 일대에서 서해 해상완충구역으로 방사포 10발을 발사했다. 엔엘엘 이남에 떨어진 포탄은 없지만 해상완충구역에서의 포 사격을 금지한 9·19 남북 군사합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합참이 설명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한국 해군이 해상군사분계선을 침범했다’고 발표했다. 북쪽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24일 새벽 3시50분께 남조선괴뢰해군 2함대 소속 호위함이 불명선박단속을 구실로 백령도 서북쪽 20㎞ 해상에서 아군 해상군사분계선을 2.5~5㎞ 침범하여 경고사격을 하는 해상 적정(적의 동향)이 제기됐다”며 “우리 군대는 24일 5시15분 용연군 일대에서 사격방위 270도 방향으로 10발의 위협경고사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주장하는 ‘해상군사분계선’은 엔엘엘보다 최대 6㎞ 남쪽에 북한이 임의로 설정한 선이다. 한국은 엔엘엘을 “남북 간의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으로 인식하지만, 북한은 엔엘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서해5도와 북쪽 육지가 만나는 부분의 바다는 절반씩 가르고, 소청도와 연평도 사이는 영해 기준을 따라 북쪽 해안에서 12해리까지 북쪽 관할로 하는 해상분계선을 주장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엔엘엘을 기준으로 정상적 대응 조처를 했고, 해상분계선을 침범했다는 북한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며 “(엔엘엘과 북한 주장 해상군사분계선 사이 해역은) 정상적인 우리 작전구역”이라고 말했다 한국 해군 함정이 엔엘엘 이남에 있었고, 경고 사격한 기관총탄도 엔엘엘을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규모 북한 어선이 조업을 하다 실수나 기관 고장 등으로 엔엘엘을 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항행 장비를 갖추고 훈련받은 선원들이 운항하는 북한 상선이 엔엘엘을 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북한 상선 월선은 2017년 1월 동해상에서 발생한 상황 이후 5년9개월 만이라고 군은 전했다.
이날 엔엘엘을 넘어온 북한 상선 무포호는 1991년 9월 스커드 미사일을 싣고 시리아로 향하다가 미국 정보당국 등의 감시에 걸려 미사일을 넘기지 못한 채 귀항한 무기수송선과 이름이 같다. 이번 무포호가 약 31년 전의 무포호와 같은 선박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름만 같은 선박인지는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당국은 상선인 무포호가 1991년처럼 다른 목적을 가진 위장선 구실을 한 것인지, 엔엘엘을 일부러 넘어와 군의 대응을 유발함으로써 북한이 국지도발 등에 나설 명분을 축적하려는 의도인지 등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북한군의 사전 승인 없이 북한 상선이 새벽 3시42분에 북방한계선을 침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이번 사태는 서해 엔엘엘을 무력화하기 위해 북한이 의도적으로 기획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 센터장은 “이번 북한 상선의 엔엘엘 침범과 북한군의 방사포 사격은 ‘서해 해상불가침 경계선’에 대한 남북한의 합의 부재를 다시 한번 보여준 것으로서 북한은 ‘전술핵무기’ 운용에 대한 자신감을 배경으로 향후 그들에게 불리하게 그어진 엔엔엘을 무력화하려 할 것”으로 예상했다.
남북이 서로 해상경계선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상대방이 넘어오면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하면서, 서해 엔엘엘 일대는 ‘분쟁, 갈등, 충돌의 바다’가 됐다. 1999년과 2002년, 2009년 서해 엔엘엘 근처에서 남북 해군 간에 세차례 교전이 발생한 바 있다. 이 일대의 우발적 군사 충돌을 방지하는 안전판 구실을 해온 9·19 군사합의(2018년)가 폐기되면, 남북 무력충돌이 재현될 수 있는 위험한 상태로 돌아가는 셈이다.
서해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해군은 24~27일 서해상에서 특수부대 침투, 국지도발 등에 대비한 대규모 해상훈련을 한다. 이는 호국훈련의 일환으로 매년 열리는 정례훈련이며, 올해는 미군도 참여하는 연합훈련 방식으로 진행된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신형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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