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4일 당 의원연찬회에선 중도파한테서조차 ‘2선 후퇴’를 요구받을 만큼 박근혜 대표의 당 장악력이 흔들리고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지난 18일 “내가 꼭 대통령되어야한다 생각하지않아”발언 관심
“공정·공평 원칙의 차원에서 총재는 대선후보 경선참여 즉시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2002년 1월6일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
“(대권경쟁이 조기에 과열되는 것은) 국민에게 송구스런 일이다. 말로만 정권재창출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는 정당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2005년 2월18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차기 대권을 자신하지도 않고 내가 (꼭) 대통령 후보가 돼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상 ‘박근혜=한나라당 대권후보’라는 등식에 대해 스스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박 대표는 지난 18일 대구지하철 참사 2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뒤 기자간담회에서 당내에 잇따른 ‘당권·대권 분리론’에 대해 “먼저 당을 개혁하고 대권은 차차 논의하자”고 말했다. 박 대표는 또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도지사 등과 벌이는 당내 대권경쟁과 관련해 “국민에게 송구스런 일”이라며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대선경쟁이 조기과열되는 것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 대표는 또 “대구·경북 의원들 가운데 ‘안방도 챙기지 못하는데 차기 대권이 되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 “차기 대권을 자신하지도 않고 내가 (꼭) 대통령 후보가 돼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당내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당권·대권 분리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꿈을 스스로 접을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라, 관심을 끌었다.
당개혁, 당권·대권 분리는 정치적 신념인가?
박 대표가 자신이 당사자인 ’당권’과 ’대권’에 대한 발언을 쏟아낸 것은 2월초에 열린 연찬회가 계기가 됐다. 연찬회를 앞두고 박 대표 지지율은 대표직을 맡은 뒤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고, 남경필 의원 등 소장파는 당의 혁신과 ‘대권후보 영입설’을 내세워 박 대표를 흔들었다. 연찬회에선 박 대표의 2선 퇴진과 ‘당권·대권분리’를 주장하는 의원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박 대표는 연찬회 들머리 발언에서 대권과 관련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을 선진화시키고 사랑받는 정당으로 만들어 오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대통령을 만들 수 있는 정당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당원들이 나를 대선후보로 뽑은 것은 아니다”며 “(당 대표) 임기 동안 당을 변화하고 개혁하라는 것”이라고 당권과 대권을 동일시하는 시각에 선을 그었다. 박 대표는 특히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나로 인해, 당에 부담이 되거나 짐이 되면 대표직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나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발언을 놓고 보면 대권후보 포기를 시사한 18일 박 대표의 대구 발언은 전혀 새로운 발언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동안 자신의 발언을 재차 강조한 셈이다. 따라서 ‘당을 먼저 개혁한 뒤 대권을 논의하자’는 ‘선 당개혁 후 대권경쟁’이나 ‘당권·대권분리론’은 박 대표의 일관된 정치적 신념으로 보인다. 동시에 대표 임기기간인 내년 7월까지 혁신적인 당 개혁을 통해 당의 지지율을 끌어 올려 대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정치적 이해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박 대표의 자승자박, ‘창’에 당권·대권분리 주장하다 탈당
박 대표가 17대 대선때 이회창씨처럼 제왕적 총재의 당연한 전리품인 ‘대선후보 합의추대’라는 안전판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는 박 대표의 경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 부총재 시절인 2002년 당시 유력한 대권후보인 이회창 총재에게 당권·대권분리론을 뼈대로 하는 당 개혁을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당권·대권분리 등 당 개혁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박 대표는 2002년 2월28일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결성했다.
당시 박 대표는 “공정·공평 원칙의 차원에서 이회창 총재가 대선후보 경선참여 즉시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며 “특별기구를 구성해 당권·대권분리와 투명한 당 재정운영, 공천제도 개선 등 정당의 1인 지배체제를 극복하고 정당개혁을 이룰 수 있는 전반적인 사항이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권·대권분리’를 이유로 탈당을 감행할 정도라면 박 대표에게는 중요한 정치적 신념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2002년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로 당권·대권 분리를 주장했던 박 대표가 되려 당내 중도·소장파들로부터 “당권·대권을 조기에 분리하라”는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박 대표가 당권·대권 분리를 대놓고 반대하거나 어물쩍 넘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확산되는 박근혜 불가론, 지지율 하락에 의기소침?
‘박근혜=한나라당 대권 후보’ 등식이 깨진 이유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지지율 때문이기도 하다.
박 대표의 위상은 ‘탄핵 역풍’속에서 치러진 지난해 4월 총선을 거쳐 6월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다시 선출될 때까지만 해도 확고부동했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리서치 & 리서치’가 매달 초 실시하는 여론조사의 야당 대표 직무수행 평가 추이를 보면, 지난해 5∼6월 박 대표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60%대로 매우 높았다. 부정적 평가는 10%대에 그쳤다.
그러나 대표 취임 뒤부터 긍정적 평가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해, 급기야 지난 1월 초 조사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긍정적 평가를 추월했다. 지난해 말 ‘4대 법안’처리과정에서 보여진 박 대표의 태도가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킨 원인으로 꼽힌다.
<조선일보>가 1월말 실시한 ‘차기 대권후보 인지도 조사’는 당 안팎에서 ‘박근혜 카드’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는 결정타가 됐다. 당시 조사에서 박 대표는 차기 대권 후보의 지지도 조사에서 고건 전 총리에 15%포인트 차로 뒤졌고 당내 경쟁자인 이명박 서울시장과도 오차범위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역별 지지도 조사에서도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경북지역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회창 전 총재에 뒤지는 충격적 조사결과가 나왔다. 한나라당 안팎에서 “‘과거사 정국’과 ‘박정희 전 대통령 흔들기’에 박 대표가 버틸 수 있을까”라는 회의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박근혜 흔들기’에 대한 심리적 저항, 당권·대권 분리 조기 가시화로 마무리될 듯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당 안팎에서 당권대권 분리론과 대권후보 영입설이 잇따라 불거져 나왔다. 소장파의 한축인 남경필 원내수석부대표는 연찬회에 앞서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에서 나아가 박진, 원희룡, 고건, 정몽준은 왜 안되나”며 “앞으로 (대권) 후보군을 더 넓혀가야 한다”고 대권후보 영입설에 불을 지폈다.
이어 연찬회에서도 중도, 소장파 의원들이 박 대표의 2선후퇴와 대권당권의 분리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이같은 당 안팎의 ‘박근혜 흔들기’가 결국 대권 포기를 시사하는 발언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느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박 대표는 대권후보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지난 대선때 노무현 대통령을 열렬히 후원한 ‘노빠’에 버금가는 ‘박빠’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온-오프라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정치인 박근혜가 이들의 열렬한 지원을 뒤로 하고 대권 경쟁에서 이탈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런 탓에 잇따른 박 대표의 대권 포기 시사발언은 당안팎에 ‘박근혜 흔들기’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나 반발로 읽힌다. 또 이런 흔들기에 대해 박 대표는 당 혁신위원회를 통해 당권과 대권 분리를 조기에 가시화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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