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대통령 3·1절 기념사 의미 과거사 쟁점화 반대 입장은 유지
발언나오기까지 상당한 사전준비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통해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 과거사 문제를 외교쟁점으로 삼지 않겠다는 종전의 기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최근 한-일 협정 문서 공개와 한-일 국교정상화 40돌 및 광복 60돌이라는 시대적 배경 등 현실의 변화를 담아낸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1일 “일본이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발언은 일단 양국간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으로 해석된다. 한-일 협정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배상 문제를 공식 언급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일 협정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면서 우리나라 일각에서 재협상이나 추가협상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과 일견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쪽의 성의 있는 노력을 촉구하고, ‘사과-반성-배상-화해’라는 세계 각국의 보편적 처리 방식을 지적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재협상이나 추가협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배상’ 발언과 관련해 “특정한 사안을 염두에 둔 구체적 요구라기보다는 보편적 방식을 설명하면서 일본 쪽이 여러 단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촉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부적인 사안은 정책적·외교적으로 다뤄질 것”이라며 “일본 쪽의 노력이 보편적 방식에 따라 이뤄지지 않을 경우 외교적인 기준에 따라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이날 연설에서도 거듭 밝혔듯이 과거사 문제를 외교적 쟁점으로 삼는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배상’ 발언은 상당히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한-일 회담 당시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징용 사할린 동포 문제 등이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 최근 지적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들 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 법원은 이들 문제 피해자들의 개인소송에 대해 한-일 협정에 의해 모든 것이 청산됐다는 입장을 확고히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원론적 차원이긴 하지만 ‘배상’을 언급하고 한-일 협정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점을 시인하고 고쳐 나가겠다고 한 이상 어떤 형식으로든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노 대통령이 이날 언급한 독일의 경우 배상은 물론이고 기업의 강제노동 등에 대한 책임도 인정해 정부와 국민, 기업이 참여한 기금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을 택했다.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이 나오기까지에는 사전 협의와 상당한 준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시민사회수석실이 원고 초안을 올렸으며, 이 과정에서 외교통상부 등 관련 부처와 논의를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백기철 기자 kcbaek@hani.co.kr
■ 정부 개인보상 논의도‘물꼬’ 노대통령 책임 인정…6월께 피해자 규모 산정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개인보상에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지난 1월17일 한일 협정 청구권 관련 문서 공개 이후 지지부진하게 전개되고 있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논의가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한일 협정 당시 개인 청구권 자금을 국가가 일괄적으로 받아 처리한 데 대해 “정부도 부족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지금부터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부는 한-일 협정 문서 공개 직후 국무총리실에 민관 합동으로 ‘한일 협정 문서 공개 대책단’을 꾸리기는 했다. 국사학계 및 국제법 전문가와 시민단체 관계자 등 민간 쪽에서 10명 정도를 포함해 대책단의 막판 인선 작업을 벌이고 있는 수준이다. 아직은 실질적인 논의는 물론이고 방침도 정해진 게 없다. 그 때문에 ‘대책 없는 공개’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노 대통령의 연설은 이 대책단이 해야 할 일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민관 대책단이 부닥치게 될 핵심문제는 보상의 범위를 어떻게 할 것인지와 그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다. 그러나 보상의 범위를 규정하게 될 피해자를 확정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 규모를 추정하는 일도 들쭉날쭉해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국회 특별법에 의해 발족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의 피해자 접수가 끝나는 6월 이후에나 대략적인 피해자 규모를 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피해자 보상을 위해선 입법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회 차원의 논의도 지켜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열린우리당 ‘한일 외교문서 공개 태스크포스’는 국가예산에만 의존하는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기업의 참여를 통한 기금 방식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포항제철(포스코)과 한국도로공사 등 당시 정부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받아 쓴 기업들이 기금을 만들고 여기에 국민도 참여하는 ‘국민모금 구상’으로 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또 피해자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 등을 고려해 개별 보상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기념사업 차원의 포괄적인 보상도 검토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이날 언급한 국민자문위원회는 이런 맥락에서 정부만이 아니라 국민적 참여와 사회적 합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 왜‘배상’이라 말했나 일제 지배‘불법’강조 한-일 관계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이 ‘불법’이란 전제 아래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 등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북한은 일본에 대해 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해 왔다. 1951년 9월 미국 주도의 연합국과 일본이 종전을 위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에 서명국 자격을 주지 않았다. 이는 국제법적으로 한국이 일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근거로 작용해 왔다. 일본은 이를 내세워 ‘배상 불가’를 주장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4조b항에 근거해 국교정상화 당시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에서 비롯된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의 청산’이라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다루게 된 것이다. 물론 배상 대신 보상이라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합법’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보상은 불법 여부를 막론하고 피해의 원상회복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쓴다.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배상’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일제의 강점은 불법적인 것이며, 사죄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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