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만의 첫 공채 출신 국가정보원장.
이는 28대 국정원장으로 내정된 김만복(金萬福) 국정원 1차장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될 것 같다.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초대 수장으로 김종필(金鍾泌) 부장이 취임한 이래 45년 만에 공채 출신 원장을 자체 배출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은 주로 군 출신이 주류였고 검찰이나 정치인 출신도 적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1980년 4월부터 석 달 간 이 자리를 거쳐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번 내부 발탁은 국정원에는 더없는 경사에 속한다.
그렇기에 인사 직전까지 김승규(金昇圭) 원장의 사의 표시와 386 운동권 출신이 연루된 이른바 `일심회' 사건 등을 둘러싸고 빚었던 온갖 논란도 잠시나마 수그러들게 만들 정도다.
김 내정자는 정통 PK 출신으로 이력에서는 엘리트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부산 기장에서 태어나 지역 명문인 부산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 1974년 국정원의 전신인 중정에 발을 들여놨다.
중정, 국가안전기획부, 국정원으로 이어진 조직의 변화, 정권의 부침에 따라 그가 국정원 내에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상세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프로필을 보면 국정원 내에서 국내, 해외, 북한 분야를 모두 거친 점이 눈에 띈다. 국내 정보 파트에서 시작했지만 16년 넘게 해외 분야에서 뛰었고 기획, 인사, 예산 쪽에서도 근무했다. 올라운드 플레이어나 멀티 플레이어라는 수사가 붙을 수 있다. 또 그 만큼 적응력이 뛰어나고 조직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을 포함해 해외 근무 기간이 10년이 넘는다는 점 등을 들어 해외 정보 전문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러 분야를 거친 만큼 정무적 감각이 탁월하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 1998∼1999년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한 가운데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한 3∼6차 4자회담에 우리측 대표로 뛰었고 2000년 6월에는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평양도 다녀왔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의 세월이 있었다는 얘기도 돌고 있다. 국민의 정부 말기에 세종연구소에 파견나가 있던 그를 거의 꺼져가는 불꽃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연구소 파견 시절 이종석(李鍾奭) 통일부 장관과 연을 맺은 그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의 정보관리실장으로 당시 이종석 사무차장과 호흡을 맞추면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특히 이라크 파병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던 가운데 남들이 기피하던 이라크 파병안 수립을 위한 제2차 정부합동조사단장을 맡은 게 그에겐 오히려 행운이었다. 2003년 11월 대통령에게 올린 관련 보고서가 객관적이고 공정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가 2004년 2월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친정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도 대통령이 직접 그를 적임자로 찍었다는 후문이다. 기조실장으로 있을 때는 탈정치, 탈권력화와 전문성 및 효율성 제고를 골자로 담은 국정원 개혁 청사진인 `비전 2005' 작성을 주도했다. 특히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출범과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를 놓고 일부 내부에서 반론도 있었지만 과거사 반성과 청산이라는 참여정부의 코드에 부합한다는 평가도 적지 않게 낳았다. 하지만 그는 청문회가 열리기 전부터 여론의 시험대에 오를 공산이 크다. 김승규 원장이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후임자와 관련, "국정원 내부 발탁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고 이는 곧 김 차장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뒤숭숭한 조직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참여정부 대북 포용정책의 상징인 이종석 장관의 인맥으로 분류되는 것도 보수색이 강한 국정원 내에서는 장점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으로 꼽힌다. 원내에서는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지만 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빈틈없는 업무 추진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만큼 잔뜩 긴장하는 모습도 감지되고 있다. 또 최근 수사 중인 `일심회' 사건까지 겹치면서 인사와 맞물려 수사의 향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사 결과에 따라 자칫하면 정치공방에 휘말릴 수 있고 국내 파트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제기되면서 조직 개편 논의가 다시 불붙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립 이후 첫 공채 출신 첫 원장으로서 원칙에 따른 공정한 인사 및 조직 운영을 보여주고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수사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준영 기자 prince@yna.co.kr (서울=연합뉴스)
중정, 국가안전기획부, 국정원으로 이어진 조직의 변화, 정권의 부침에 따라 그가 국정원 내에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상세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프로필을 보면 국정원 내에서 국내, 해외, 북한 분야를 모두 거친 점이 눈에 띈다. 국내 정보 파트에서 시작했지만 16년 넘게 해외 분야에서 뛰었고 기획, 인사, 예산 쪽에서도 근무했다. 올라운드 플레이어나 멀티 플레이어라는 수사가 붙을 수 있다. 또 그 만큼 적응력이 뛰어나고 조직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을 포함해 해외 근무 기간이 10년이 넘는다는 점 등을 들어 해외 정보 전문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러 분야를 거친 만큼 정무적 감각이 탁월하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 1998∼1999년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한 가운데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한 3∼6차 4자회담에 우리측 대표로 뛰었고 2000년 6월에는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평양도 다녀왔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의 세월이 있었다는 얘기도 돌고 있다. 국민의 정부 말기에 세종연구소에 파견나가 있던 그를 거의 꺼져가는 불꽃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연구소 파견 시절 이종석(李鍾奭) 통일부 장관과 연을 맺은 그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의 정보관리실장으로 당시 이종석 사무차장과 호흡을 맞추면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특히 이라크 파병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던 가운데 남들이 기피하던 이라크 파병안 수립을 위한 제2차 정부합동조사단장을 맡은 게 그에겐 오히려 행운이었다. 2003년 11월 대통령에게 올린 관련 보고서가 객관적이고 공정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가 2004년 2월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친정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도 대통령이 직접 그를 적임자로 찍었다는 후문이다. 기조실장으로 있을 때는 탈정치, 탈권력화와 전문성 및 효율성 제고를 골자로 담은 국정원 개혁 청사진인 `비전 2005' 작성을 주도했다. 특히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출범과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를 놓고 일부 내부에서 반론도 있었지만 과거사 반성과 청산이라는 참여정부의 코드에 부합한다는 평가도 적지 않게 낳았다. 하지만 그는 청문회가 열리기 전부터 여론의 시험대에 오를 공산이 크다. 김승규 원장이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후임자와 관련, "국정원 내부 발탁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고 이는 곧 김 차장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뒤숭숭한 조직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참여정부 대북 포용정책의 상징인 이종석 장관의 인맥으로 분류되는 것도 보수색이 강한 국정원 내에서는 장점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으로 꼽힌다. 원내에서는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지만 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빈틈없는 업무 추진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만큼 잔뜩 긴장하는 모습도 감지되고 있다. 또 최근 수사 중인 `일심회' 사건까지 겹치면서 인사와 맞물려 수사의 향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사 결과에 따라 자칫하면 정치공방에 휘말릴 수 있고 국내 파트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제기되면서 조직 개편 논의가 다시 불붙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립 이후 첫 공채 출신 첫 원장으로서 원칙에 따른 공정한 인사 및 조직 운영을 보여주고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수사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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