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일반

“반한나라 세력 결집 징검다리 되겠다”

등록 2007-06-12 19:23수정 2007-06-12 23:23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기자실에서 대선 불출마와 탈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원혜영 최고위원(맨 왼쪽)을 비롯한 의원과 당직자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기자실에서 대선 불출마와 탈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원혜영 최고위원(맨 왼쪽)을 비롯한 의원과 당직자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김근태, 대선불출마 선언
“열린우리당 실정, 십자가 지겠다
6·10항쟁 기념일 전날 최종 결심”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무겁고 결연한 표정이었다. 눈시울은 붉었다.

12일 오전 10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 위해 국회 기자회견장을 찾은 김 전 의장은 “평화개혁 세력의 대통합을 이루는 작은 밀알이 되겠다”고 말했다. 준비해 온 원고는 에이4(A4) 용지 여섯 쪽이었으나, 김 전 의장은 밑줄 친 부분만 강조해 읽었다.

그는 “2007년 대선은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밀고 온 모든 것을 걸고, 이를 거꾸로 되돌리고자 하는 한나라당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격돌이다.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에 대해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면 제가 그 십자가를 지고 무덤 속으로 걸어가겠다”며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노영민·선병렬·우원식·유승희·이기우·이인영·최규성 등 김 전 의장을 지지하는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소속 의원들뿐 아니라, 원혜영 최고위원, 임종석·우상호·이계안·민병두 의원 등이 숙연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김 전 의장은 이날 저녁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특강 자리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많이 착잡하고 마음이 허전하기도 하지만, 현재 상황을 희망과 낙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기자회견 뒤 가진 일문일답이다.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된 이유는?

=우선 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번째로 상황이 절박하다. 그래서 결단했다. 제가 가진 것부터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기득권이지만 (이를) 버리는 것이 대통합신당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앞으로의 일정이나 계획은?

=한나라당은 절대 안 된다. 한나라당은 부패했고 냉전적이고, 부자 중심의 정책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집권 시절 아이엠에프(IMF)를 불러온 세력이고, 그때 경제철학이 바뀌지 않았다. 그런 정책을 시행하면 국민 대립과 갈등이 폭발할 것이다. 그런 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는 것은 역사적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한나라당 집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징검다리가 되겠다. (내부의) 정책 차이는 경쟁을 통해 주도권을 잡는 쪽과 협력하는 쪽으로 역할을 나눌 수 있다고 본다.

-범여권의 다른 대선 주자들과 상의했나?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민주당과는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이 모두 모이고, 그 내부에서 경쟁하면 된다. 각계각층을 모두 만나겠다.

-불출마 결정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이었나?

=중산층과 서민 중심으로 생활정책을 펴나가야 하는데, 후보로서 하는 게 효과적인지, 후보가 아닌 신분으로 하는 게 효과적인지 고민했다.

-언제 결심했나?

=6·10 항쟁 기념일 하루 전날쯤 최종 결심했다.

김 전 의장은 측근 의원들한테도 전날인 11일 저녁에야 불출마 결심을 알렸다고 한다. 팬클럽인 ‘김근태 친구들’ 회원 6~7명은 김 전 의장의 서울 창동 자택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운 뒤 이날 아침 김 전 의장의 출근길을 막아서기도 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김근태가 ‘걸어온 길’
2002대선 때도 ‘단일화 대의’ 내세워 후보 사퇴

김근태(60) 전 의장은 1987년 대선을 경주교도소에서 맞았다.

그해 6월 항쟁에서 민주세력이 승리했지만, ‘양김’(김영삼-김대중)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선거 당일 밤 12시30분 결과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교도관에게 물어보았다. 교도관은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말했다. 그는 절망했다. ‘분열’과 그로 인한 ‘패배’의 추억이었다.

김 전 의장은 12일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대의를 취했다. 현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어려운 일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명분과 대의를 좇았다. 67년 대통령 선거 규탄시위를 시작으로 ‘운동권’의 길을 걸었다. 서울대생 국가내란 음모사건과 학생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71년부터 7년 동안 수배자 생활을 했다. 5·6공 시절 그의 신분은 재야인사였다. 83년 민청련, 88년 전민련을 결성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죽음의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정치는 95년에야 늦깎이로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개혁 성향이 너무 강한 탓에 당내 ‘비주류’에 머물렀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노무현 후보와의 ‘개혁후보 단일화’를 내세우며 중도에 후보를 사퇴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 열린우리당 초대 원내대표, 보건복지부 장관(2004년 7월~2005년 12월)을 지냈지만, 노 대통령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의 마지막 ‘기회’는 지난해 6월부터 8개월 동안 맡았던 열린우리당 의장직이었다. 하지만 당의장은 그에게 ‘독배’였다. 열린우리당은 물론이고 그 자신의 지지율도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대선 포기 압력에 시달렸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그가 헤쳐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끝까지 버텼다면 범여권 통합은 지지부진할 수 있다고 정치권에선 말한다. 그의 대선 포기가 민주화 세력 전체를 살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평가도 나온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1.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2.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3.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4.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5.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