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사과·원장 파면 요구
중앙지법 “부적절한 행위”
중앙지법 “부적절한 행위”
국가정보원 요원이 이명박 대통령이 한겨레신문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부에 전화해 진행 상황을 묻는 등 사찰을 벌인 것을 두고, 법원이 유감을 나타냈다. 법조계와 정치권에선 국정원법 위반이라는 지적과 함께 책임자를 문책하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법원장 신영철)은 4일 ‘국가정보원 직원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입장’을 발표하고 “국정원 직원이 재판장에게 진행상황을 문의한 것은 의도가 어떠하든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깨뜨릴 수 있는 부적절한 행위로서 유감스럽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이날 ‘이명박 정부는 이제 법원까지 통제하려 하는가’라는 성명에서 국정원법은 국내정보 수집 범위를 ‘국내보안정보(대공·대정부전복·방첩·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로 제한한다며 “재판 관여는 국정원의 직무에 해당하지 않는 직권남용 행위로 불법임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또 “이는 국정원이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며 “사법권 독립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말했다.
국정원법이 국내정보 수집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은 정치 분야 등의 사찰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여전히 법원 담당 연락관을 두고, 법원 안팎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더욱이 국정원 쪽은 공개재판 방청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택근 변호사는 “대부분의 재판은 국정원의 정보 수집 범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국정원 요원이 이런 재판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직권남용”이라고 말했다.
야권도 국정원의 행위가 “명백한 불법사찰”이라며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책임자 문책을 촉구했다. 통합민주당 공안탄압대책본부는 성명에서 “국정원이 ‘자연인 이명박’의 재판에 개입하고자 한 것은 명백한 불법사찰”이라고 못박았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도 논평에서 “청와대와 국정원은 사법부 독립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는 행위를 즉각 사과하고 관계자를 엄정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선 판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80년대 정보기관 요원들이 법원을 출입하며 시국사건 등에 개입하는 것을 지켜 본 일부 고위직 판사들은 과거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이 옛날로 돌아가겠다는 것인지 걱정된다”며 “이런 일에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도 “군사정권 때나 있던, 말로만 듣던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판사들도 씁쓸해하고 있다”며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이 원고인 소송에 국정원이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판사들에겐 ‘무언의 압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원공무원노조도 이날 성명을 내어 정부의 사과와 국정원장 파면, 대법원의 공식 자세 천명을 요구했다. 박현철 강희철 기자 fkcoo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