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5년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가 40년만에 공개된 17일,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한 시민이 당시 외교문서가 수록된 마이크로 필름을 살펴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전문가 평가
법률검토·최종협상 과정등 공개안돼
위안부등 인권피해자 배상 논의없어
개인보상, 한·일정부 공동책임 확인
17일 정부의 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비판적이다.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문제가 소멸되지 않았다는 판단의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 문서 공개를 요구했는데, 정작 공개된 문서에는 이에 대한 핵심 내용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면 그동안 진행된 일본기업 등을 상대로 한 개별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번 문서 공개는 일제 피해자 개인보상에 대한 한·일 정부의 ‘공동책임’을 확인했다는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강제동원 진상규명 시민연대 등 피해자 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역사학자·법률가·국제관계 전문가 등의 분석과 비판을 담은 검토 의견서를 17일 공개했다. ◇ 베일에 싸인 개인 청구권 처리 과정 = 이들은 의견서에서 이번 문서공개로는 “개인 청구권 소멸에 대한 법률적 검토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들이 있었는지 전혀 확인할 수 없다”고 짚었다. 협상 당시 일본 정부는 “국내적으로 여러 조처가 필요하므로 (청구권의) 어떤 것이 소멸되는 지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고 제기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에 대한 회의록은 이번에 공개되지 않은 것이다. 이세일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최종적인 한일협정에는 (국가 및 국민의) 청구권이 해결된 것으로 규정돼 있지만, 이런 협정문안이 나오는 과정의 단계별 협상 과정에 대한 문서들이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강제 동원자를 제외한 다른 유형의 피해자들에 대해 개인의 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이세일 연구원은 “공개문서를 보면 일본 정부가 북한에 관한 청구권 문제, 재일 한국인의 청구권 문제 등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력해 연구하자고 제의했는데, 이 개별 사안들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기록한 문서가 없다”고 밝혔다. 추가 문서공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청구권을 둘러싼 엇갈린 시각 = 그나마 공개 문서를 통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 점은 청구권 자금의 성격을 둘러싼 두 나라 정부의 서로 다른 시각이다. 일본 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구권 자금이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는 배상적 성격을 갖는 청구권 자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오오타 오사무 와세다대 강사는 “일본이 개인 청구권 문제를 봉인하기 위해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던 점을 엿볼 수 있다”며 “당시 청구권 교섭이 피해자 개인보상을 배제한 형태로 재산문제, 경제협력문제로 일관했음이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김창록 부산대 교수(법학)도 “시종일관 경제협력을 고집한 일본 정부는 청구권 문제를 전적으로 방치했음이 드러났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한국 정부 또한 개인보상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군위안부 등 인권침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최영호 영산대 교수(국제학)는 “두 나라가 피해자 개인의 보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국가 정책만을 고려한 교섭을 벌였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당시 한일협정의 성격은 역사적 인식의 차이를 미봉한 가운데 맺은 사실상의 경제협력이었으며, 이에 따라 청구권 자금 총액을 정치적으로 포괄타결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 한·일 정부의 책임 = 그런 점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두 나라 정부 모두에게 (개별 보상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자 가운데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보상 조처를 마련하면서 군위안부 등 인권침해피해자를 배제했고, 일본 정부는 피해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은폐하고 입증 책임을 한국 정부에 떠넘기면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의 명분만 고집했다는 것이다. 오오타 강사는 “한·일 협정 관련 자료를 전혀 공개하고 있지 않은 일본도 이제 자료를 공개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심을 주문했다. 그는 특히 “지난 98년 한·일 공동선언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에 의한 피해와 고통에 대해 반성의 뜻을 밝혔는데, 이는 침략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한일협정의 입장을 변경한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에서 머물지 말고,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보상을 실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영호 교수는 “입증의 어려움 때문에 피해자 개별 소송에 의한 구제는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으므로, 두 나라 정부와 기업이 함께 개인 피해구제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 추가 문서공개의 필요성 = 관련 전문가들은 진실규명에 필요한 추가 문서 공개도 강력히 요구했다. 한일협정의 진실이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일 협정과 관련해 외교통산부가 생산한 문서의 전체 목록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며 “민간의 노력으로 어렵게 존재유무를 확인한 일부 문서를 정부가 마지못해 공개하는 방식으로는 진상규명은 물론 과거사 청산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문서의 대부분은 3급 비밀문서 분류된 것들이다. 이는 개인 청구권 문제를 포함한 핵심논의들이 기록된 기밀 문서들의 공개 필요성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김 연구원은 “근본적으로는 3급 비밀 문서조차도 40년만에 풀어놓는 구태의연한 정보공개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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