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 관련 8명이 희생된 서대문구치소 사형장에 헌화하고 있는 박중기 의장. 사진 <통일뉴스> 제공
그때 그 사람 인혁당 투옥 박중기씨
박중기의 아호는 ‘헌쇠’다. 고철장사를 하던 시절 이돈명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좋은 쇠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철이 섞여야 하듯, 필요로 하는 곳에서 언제나 먼저 묵묵히 도움을 주는 존재라 했다. 그는 그 아호를 좋아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여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울구치소에서였다. 서울대에 다니던 나는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투옥되었고, 그는 이른바 ‘제1차 인혁당사건’으로 수감중이었다. 저마다 독방에 요시찰 대상이었던 까닭에, 우리는 중앙정보부로 조사받으러 다닐 때 겨우 눈길만 주고받는 사이였다.
3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중기는 부산으로 유학 온 고교 시절 일생의 지기 김금수와 이수병을 만났다. 부산사범·부산고 친구들과 함께 55년 사회과학 토론모임 ‘암장’(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을 꾸려 변혁운동의 분출을 모색했다.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이들은 경희대 부근 이문동 이수병의 자취방을 아지트 삼아 암장 활동을 계속했다. 60년 4·19혁명 직후엔 부산 중심의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에 참여해 박중기는 투쟁국장, 김금수는 서울맹부 간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로 혁신계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이수병은 체포되고, 김금수는 입대했으며, 대다수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러다 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이 터져 체포됐던 박중기는 결국 반공법 위반으로 1년간 실형을 살았던 것이다.
그의 삶이 남다른 것은 투쟁과 투옥 때문만이 아니라 이후 한결같은 헌신 덕분이다. 출옥해 한동안 목재장사로 동지들의 생계를 돕던 그는 74년 이수병이 운영하던 삼락일어학원에서 일하다 ‘김정태 등의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6개월간 수감됐다. 그런데 석방되자마자 이번에는 제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터졌고 그는 또다시 중정에 끌려갔다. 하지만 ‘수감중’이었던 확실한 알리바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때 동지 김용원이 자기 대신 희생됐다고 믿는 그는 죄책감을 씻고자 평생토록 인혁당 가족들을 보살펴왔다. 블록 구멍가게로 시작해 77년 고물장사에 이어 고철수집상으로 사업을 키운 그는 사회안전법 탓에 서로 만날 수조차 없었던 동지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연대보증과 한신공영 부도사태 등으로 끝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돕거나 베푼다는 생각조차 없이 일생토록 보시를 했다.
2004년 그는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추모연대) 의장직을 맡았다. 스스로 “나이 칠십에 능참봉”이라 하듯 제사 지내 주는 일을 도맡은 것이다. 2008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유가족들이 국가배상금을 출연해 만든 4·9통일평화재단의 이사도 맡고 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묻혀지고 잊혀진 죽음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그는 늘 분주하다.
박현채 교수가 풀려나던 78년 무렵 우리는 거시기 산우회의 회원으로 재회했다. 이후 그는 산악회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그의 해학은 우리들의 우울했던 70년대와 80년대의 고난을 한때나마 잊게 했다. 그가 있어 행복했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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