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 기간중 유권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영춘 후보. 부산/박승화 한겨레21기자 eyeshoot@hani.co.kr
[토요판] 부산진구갑 낙선 김영춘씨
가족 이끌고 고향 내려와
빨갱이란 말도 들었지만
나라가 건강해지려면
망국적 지역구도 깨져야
가족 이끌고 고향 내려와
빨갱이란 말도 들었지만
나라가 건강해지려면
망국적 지역구도 깨져야
지난 11일 부산 부산진구 개성고등학교 체육관. 투표함의 집계가 나올 때마다 새누리당 나성린(59) 후보 쪽과 민주통합당 김영춘(50) 후보 쪽에서 환호성과 탄식이 서로 오갔다. 적게는 4표에서 많게는 몇백표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을 벌인 끝에 나 후보가 3.7%포인트(3598표) 차이로 이기자 김 후보 쪽은 장탄식을 내뱉었다. 방송3사 출구조사에서 0.3%포인트 차이로 나 후보를 이기는 것으로 나온데다 개표 초반 계속 앞서 나가 ‘큰일’을 낼 것으로 예상됐으나 부전동 등에서 뒷심이 밀려 역전을 당한 터라 더욱 아쉬웠다.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12일 저녁에 김 후보를 선거사무소에서 만났다. 그는 이날 오후부터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낙선사례를 하느라 바빴다. “애초 당선을 확신하고 출마한 것이 아니었지만 선거운동이 시작되니 지지율이 치고 올라갔어요. 기대감이 높아져서 그런지 막상 패배하고 나니 실망감이 크게 다가옵니다.”
그가 새누리당 텃밭인 부산에 출마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2010년 10월이다. 2008년 재선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치권을 떠났다가 2년 만에 민주당(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으로 복귀하던 때다. “2년 동안 주로 글을 쓰고 여행을 하면서 정치와 거리를 뒀는데 거대 여당의 폭주를 보면서 역사적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망국적인 지역구도를 허물겠다며 부산행을 결심한 그는 자신이 졸업한 성지초·개성중·동고가 있는 부산진구를 선택했다. 그러자 그를 아끼던 지인들은 “왜 상대적으로 당선이 쉬운 서울을 버리고 사지나 다름없는 부산진갑에 출마하느냐”고 말렸다. 부산진갑은 1990년 3당합당 뒤 20년 동안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 후보가 50%에 육박하거나 넘어서는 득표율로 당선될 정도로 새누리당 지지세가 견고한 곳이다. 새누리당의 텃밭인 부산의 18개 선거구 가운데서도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선거 직전 지방의 지역구에 집을 구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서울로 다시 가버리는 후보들을 닮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지난해 6월 부산진구 연지동의 아파트를 구했다. “아내는 서울 사람이고 외아들(현재 중2)은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내가 아들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는데 프로야구 엘지팬인 아들이 롯데 연고지에 갈 수가 없다고 버텼어요. 그런데 이 녀석이 지난 겨울방학 때 ‘아빠를 위해 내가 생각을 바꾸겠다’고 말하더군요.”
고향에서 뼈를 묻겠다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시선은 대부분이 자식을 서울로 보내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로 서울의 중학교에 다니던 외아들을 부산으로 전학시키는 등 온 가족이 함께 부산에 정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차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선거기간 위기감을 느낀 나 후보 쪽이 ‘친북 좌파’라는 색깔론 공세를 퍼붓기도 했으나 텔레비전 토론회 등에서 네거티브 전략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유권자들을 파고드는 선거운동을 펼쳤다. 지역감정과 함께 상대방을 무조건 헐뜯는 비방과 색깔론이 사라져야 새로운 선거문화를 꽃피울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는 내성이 생겨서 색깔론이 먹히지 않는데 아직 부산에서는 흡수력이 큰 것 같습니다. 특히 노년층이 심하더군요. ‘빨갱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참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는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패배 이유에 대해 그는 “준비기간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2010년 10월 부산 출마를 선언한 뒤 민주당 최고위원 구실을 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지역구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 선거 준비에 올인한 것은 지난해 12월로 보면 된다. 그래서 준비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아쉬워했다. “우리나라가 좀더 건강한 나라가 되려면 부산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부산은 특정 정당을 짝사랑했지만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되레 활력을 잃었습니다. 도시가 건강해지려면 일당의 독점구도가 깨지고 서로 견제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합니다.”
그는 “나의 삶은 도전과 실험의 연속이었다”며 “10년 안에 부산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밑그림에 차질이 생겼지만 여기서 중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그는 2000년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 국회에 입성했으나 2003년 지역구도를 뛰어넘는 전국 정당을 만들겠다며 한나라당 의원 4명과 함께 탈당했다. 이른바 ‘독수리 5형제’의 한 명이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 광진갑에서 재선에 성공한 그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과 합당한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했고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를 지지하면서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망국적인 지역구도 타파를 새로운 정치적 목표로 삼고 30년 만에 고향 부산에 돌아와 몸을 던졌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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