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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배우고, 자유롭고, 삶 바꾸는 노동으로…법·제도 바꿀것

등록 2012-04-29 22:11수정 2012-04-29 22:13

조국의 만남 | ‘전태일 동생’ 전순옥 19대 국회의원

전순옥 ‘참신나는옷’ 대표. 7-80년대 참혹했던 노동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사람, 영국 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도 ‘미싱공’으로 돌아온 사람,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정책이 온 사회를 관철해가는 속에서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의류공장을 만들어 운영한 뒤 정치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을 노동절을 앞둔 4월27일 만났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를 되뇌며.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 @patriamea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며 외친 구호 중 하나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였다. 열악한 노동현실을 타개하려고 분투하다가 근로기준법을 발견하고 몹시 기뻤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법률이 유명무실한 존재임을 알고 절망한다. ‘자본은 물론 국가도 나를 기만했구나’라며 탄식을 했을 것 같다.

“만약 근로기준법이 없었다면, 오빠는 그 법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죽지 않고 투쟁했을지 모른다. ”

-노동관련법이 과거보다는 좋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법은 노동자에게 족쇄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국회의원이 되셨기에 법을 만들고, 바꾸고,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는 권한을 4년 동안 가지게 됐다. 그런데 새누리당 비대위원인 조동성 교수도 찾아와 영입 제안을 한 것으로 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나는 새누리당을 못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간단히 거절했다.”

-통합진보당쪽의 제안은 있었나?

“없었다. ”

전순옥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인과 조국 교수와 함께 27일 오후 서울 청계천6가 전태일 다리에 설치된 ‘전태일 열사 동상’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전순옥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인과 조국 교수와 함께 27일 오후 서울 청계천6가 전태일 다리에 설치된 ‘전태일 열사 동상’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전태일·이소선에 대한 기억
오빠는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
스포츠 중계하듯 이야기 잘해
엄마 이소선 어렵게 살면서도
‘난 행복해’ 라며 무한한 사랑 줘

-괴로운 기억이겠지만 오빠가 분신할 당시 16살이었죠?

“고등공민학교라는 일종의 야간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낮에는 오빠 따라 공장에서 ‘시다’(보조) 일을 했다.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가 미싱 일 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종로 4가 단성사 극장 아래 10명 정도가 양복을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다. 분신 당시 그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빠가 분신한 뒤 공안당국이 거액을 들고 찾아왔다는데.

“영안실 조의금 내는 곳에 큰 하늘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어머니가 작은오빠와 저, 동생을 나오라 해서, ‘저 가방 안에 굉장히 많은 돈이 있다. 저 돈을 받으면 너희들이 공장 안 다니고 학교 다닐 수 있다’라고 했다. ‘안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고 제가 여쭤보니, 어머니가 ‘안 받으면 오빠의 뜻을 따라야 한다. 식구 모두가 계속 공장 다니며 먹고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당시 오빠 뜻이 정확히 뭔지 몰랐다. 그런데 방을 청소하다가 본 오빠 일기장이 떠올랐다. 그 일기 보던 날 무지하게 많이 울었거든. 자기가 배고프게 살았던 이야기, 평화시장에서 고생하는 아이들 이야기 등이 생각나면서 오빠 뜻이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 돈 받지 말자. 공장 계속 다니겠다’고 답했다.”

-그 돈가방은 어떻게 했나?

“어머니가 영안실로 돌아가서 ‘이 돈 필요 없다. 당신들 가져가라’고 외치며 돈 가방 속의 돈을 꺼내 바닥에 뿌렸다. 노동청장, 중부경찰서 경찰, 평화시장 대표, 양복 입은 남자들이 주섬주섬 챙기더라. 이후 엄마는 오빠의 뜻을 이으셨다.”

-사실 ‘전태일 정신’은 ‘전태일-이소선 정신’이 아닌가. 고 이소선 여사의 삶 속에서 전태일은 언제나 살아있었고 그 정신은 확산, 심화되었다.

“오빠가 거대한 벽에 작은 바늘 구멍을 냈다면, 어머니는 온몸으로 그 구멍을 크게 만들기 위해 40년을 살았다. 어머니는 노동자가 투쟁하는 곳에 다 가셨다. 24시간 내내 안기부나 경찰 정보과 형사들의 사찰과 미행이 있었다. 나는 자식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준 어머니가 정말 고맙다. 항상 어렵게 살면서도 ‘난 행복한 엄마고, 행복한 할머니야’라고 말하셨다. 어머니는 ‘사람을 사랑하면 뭐든지 해주고 싶지 않니’라며,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다. 운동도 정치도 그런 거 같다.”

-16세 소녀로서 오빠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오빠는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거의 개그맨이었다.(웃음) 예컨대, ‘쥐 한마리가 남대문 지하도로 안 가고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이어서 이 쥐는…’, 이런 말을 아나운서가 스포츠중계 하듯이 재미있게 잘했다.(웃음) 춤도 잘 췄고. 제 친구들이 오빠 이야기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불 밑에 발 넣고 오빠 이야기하는 거 들으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오빠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끝에는 슬픈 이야기를 해줬다.”

-당시 청계노조는 노동운동의 선봉이었고, 전순옥 대표는 그 핵심으로 맹렬히 투쟁했다. 1987년 전국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무엇을 했나.

“1971년 이후 쭉 여러 군데의 공장에서 일했다. 77년 어머니가 구속되어 옥바라지 때문에 공장을 못 다녔다. 1978년 동일방직 사건 지원투쟁을 하다가 잡혀 가 경찰서에서 2주 동안 갇혀 있었다. 정식재판은 물론 즉결재판도 없이. (동일방직 사건은) 회사쪽이 노조활동을 하던 여성노동자들의 얼굴에 똥을 바르고 몸에 똥물을 퍼붓고 폭행을 가했던 야만적 사건이었다. 87년 6월 항쟁이 터져 명동성당에서 단식투쟁이 진행되었는데, 그 안에 있었다. 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서 전국의 여러 현장을 방문했다. 이제 노동자 세상이 도래하겠구나 생각했다.”

노동운동 그리고 영국 유학
착취당하는 노동자 현실 고민
89년 영국 유학, 노사관계 공부
귀국해보니 노동자들 더 비참
‘벽’ 맞선 김진숙 만나보고 싶어

-그런데 89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이유와 배경은?

“88년 11월 일본 전국노동자평의회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서 노동조합 지부를 거의 다 방문했다. 그런데 40대 노동자가 나를 찾아와 고백할 것이 있다고 했다. 60년대 어렸을 때 공장에서 일했는데, 공장이 한국으로 옮기는 바람에 해고가 되자 한국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유지하는 바보들이라고 맹비난했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 노동자 잘못이 아니라 기업 자본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89년 4월 독일 금속노련 초청으로 독일을 갔는데, 거기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큰 충격이었다. ‘이제 한국에서만 싸운다고 노동자 세상이 도래하지는 않는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며 고민했다.”

-학비는 어떻게 조달했나?

“성남 메리놀 수도원 소속 수녀님이 영국의 가톨릭 단체를 소개해주었다. 그 단체 주선으로 영국인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여 하루 3파운드를 벌면서 영어학원을 6개월 다녔다. 이후 런던의 사우스뱅크라고 나중에 대학이 된 곳의 야간 프로그램에 등록하여 영국 노동운동사를 2년간 공부했다. 평생교육기관이라 돈 하나도 안 냈다. 귀국하려 했는데, 이 학교에서 공부하던 선배가 옥스퍼드 러스킨 칼리지 얘길 해줬다. 세계 많은 나라 노동자들도 와서 공부한다고 했다. 가톨릭단체와 독일 미제레오르에 장학금 신청을 했는데 2년 장학금이 나왔다. 문정현 신부님이 추천사를 써주셨다. 러스킨 칼리지에서 노동사회학과 노사관계를 공부하여 두 개의 디플로마를 취득했다. 그랬더니 지도교수가 더 공부한 후 귀국하라고 권했고, 장학금도 주선해주었다. 그래서 워릭대로 가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워릭대 박사논문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는 2001년 워릭대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다. 전 대표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단체와 노동단체의 국제연대 덕이 아니었나 싶다. 자국은 물론 외국의 노동자까지 공부시켜서 노동이 사회와 정치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려는 노력,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각종 고등교육체제가 부럽다.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두 가지 예를 들고 싶다. 한국 수능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국에는 A레벨 시험이 있다. 이 시험 보는 날 지하철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한국이었으면 ‘수험생을 볼모로 잡은 집단이기주의’ 운운하며 매도했을 텐데, 그런 게 없었다. 또 리버풀에서 소방관 노조가 파업을 하는 기간 중 불이 나서 아이들이 죽었다. 그런데 언론은 소방관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면서 소방관 대우를 잘 해주지 않으니 아이들이 죽지 않았냐는 요지의 기사를 내보냈다.”

노동해방 노동자서 정치인으로
전태일 정신은 인간사랑
국회서 자본의 논리 막고
가난한 사람 앞 높은 담
어떻게든 얇고 낮게 만들것

-노동과 노동자를 단지 비용이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반응이다. 2001년 4월 귀국하여 대학으로 가지 않고 왜 창신동으로 돌아와서 ‘시다’ 일을 다시 했나?

“귀국하여 보니 민주노총도 한국노총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87년 이전에 비하면 노동조합의 힘도, 노동자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런데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노조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청계노조도 없어졌다. 하루 13~14시간, 토요일까지 일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럴까라는 질문을 풀기 위해 창신동에 자리 잡았다. 89년 유학가기 전에 점퍼 하나가 4800~5000원이었는데, 귀국하니 가격이 3000원으로 떨어져있었다. 한국 기업들은 다 떠나버렸고. 현재 여기 노동자들은 중국이나 더 싼 노동력을 가진 나라 노동자와 경쟁선상에 놓여있다. 사장이 ‘한국에서는 임금이 비싸서 장사 못하겠다. 중국으로 공장 옮기겠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사장이 정하는 임금을 받으며 노동할 수밖에 없는 거다.”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농성투쟁을 한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민과도 연결되어 있다. 제조업 회사가 외국으로 가면 평생 그 일에 종사한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없어진다.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이자 한국 경제의 새로운 발전전략이 필요한 시기이다. 귀국 후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을 많이 했다.

“조직화된 노동운동에 포괄되지 못한 노동자들은 더 처참해졌다. 이러한 노동자의 80~90%는 여성이다. 당시 민주노총은 대기업 중심 노동조합 조직에 집중했다. 민주노총에 가서 ‘이러면 영국처럼 노동운동 망한다.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노동조합 조직을 갖고 조직에 들어오지 않은 노동자를 대변해야 노동운동이 산다’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권익을 우리 노동자가 지켜주지 않으면 우리가 그렇게 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주장은 먹히지 않았다.”

-김진숙씨를 만나봤나?

“못 만나봤다. 크레인에 있을 땐 어머니가 병원에 계셔서 못 갔다. 꼭 만나보고 싶다.”

-노동운동의 선후배로 하실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이제 ‘참신나는옷’ 얘기를 해보자.

“처음엔 노동자들의 기술을 고급화하여 고부가가치 옷을 만들려고 기술교육학교를 시작했다. 3년 했지만 고급화된 기술을 가져도 취업할 곳이 없었다. 그 때 <전태일 평전>의 모범기업체 생각이 났다. 존루이스 파트너십이란 영국 회사도 생각이 났다. 자본주의 시장경쟁력을 갖추면서도 회사 내 분배는 사회주의적으로 하는 기업이다. 노동을 투자하건 자본을 투자하건 이윤 분배는 동등하게 한다. 6만9000명이 일하는데 비정규직이 하나도 없고 모두 주주이다. 이런 회사 한번 만들어보자 마음먹었다.”

-노동운동의 궁극적 목표로 노동해방을 얘기해왔다. 지금 시점에서 노동해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노동해방은 노동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신나고 주인되는 노동을 하는 거다. ‘참신나는옷’이란 이름은 만들면서 신나고, 입으면서 신나는 옷이란 의미이다. 내가 노동하는지, 노동이 나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 여전하다. 나는 ‘3D’, 즉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노동을 ‘3L’, 즉 배우고(learning) 자유로워지고(liberating) 삶을 바꾸는 (life-changing) 노동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을 하며 즐겁다면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거다. 노동하면서 불행하면 인간으로서 즐거움이 없어지고 기계가 된다.”

-사회적 기업 운영이 쉽지 않았을 텐데.

“조금 희망이 보인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도 노동조합과 연대해야 성공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유니폼 시장을 보자. 4조 원 가량의 시장이다. 대기업노조나 공기업노조에서 옷을 선택할 때 어떤 옷을 택해야 일자리가 느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게 간접연대고 사회연대다. 2005년 미국 8개 대학을 방문했을 때 강연에 온 노동자와 교수들이 자신이 입은 옷 안에 ‘유니온 메이드’라고 적힌 표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더라. 2008년 회사를 만들어 2009년 전공노 점퍼 1000장을 주문받아 13만5000원 짜리로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2010년 1월에 전공노가 정치후원금 냈다고 압수수색을 당하니 우리 직원들이 걱정을 하더라. 그 전엔 자신이 노동자이면서 데모나 파업 싫어했는데, 이제 ‘그 사람들 잡혀가면 우리 일감 없어진다’고 생각한 거다. 그런데 재벌들이 옷 시장을 먹으러 들어온다. 롯데가 ‘자라’나 ‘유니클로’를 들여왔다. 동대문에도 롯데가 건물을 샀다고 하더라. 앞으로 이곳의 작은 옷 제조업체들이 치명적 타격을 받을 꺼다. 무자비한 확장으로 기업생태계가 다 파괴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나라 중 한국만큼 독점자본의 무한독주를 허용하는 나라는 없다. 요즘 재벌은 ‘문어발’이 아니라 ‘지네발’이다. 정치를 택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과거 청와대 노동비서관,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자리 다 거절했었는데….

“귀국 후 11년 동안 여기 있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았다. 여기 사람들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전순옥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확인했다.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고 연대를 강화하고 제조업을 살리고 기업생태계를 정상화하려면 정치로 들어가 법과 제도를 바꾸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앞에 높고 두꺼운 담이 놓여 있다. 어떻게든 이 담을 얇고 낮게 만들고자 한다.”

-전태일 정신을 구현하는 정치인이 되길 빈다.

“전태일 정신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국회에 들어가 자본의 논리만 판을 치는 것을 막을 것이다. 오빠와 어머니에 이어 나의 몫과 소명을 다 하겠다.”

정리/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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