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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김덕 전 안기부장이 입 열어야 하는 이유

등록 2005-08-04 15:00수정 2005-08-04 15:18

김영삼 대통령과 김덕 안기부장.
김영삼 대통령과 김덕 안기부장.
미림팀 재건 몰랐다면 현철씨 역할 방증…알았다면 자신이 책임져야
‘X파일’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해진, 옛 안전기획부의 불법도청 테이프 사건이 검찰 수사 단계로 넘어가면서 희미해진 이름들이 있다. 언제부턴가 삼성이, 그리고 테이프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건 초기에 등장했다가 아예 잊혀져버린 이름도 있다. 김덕 전 안기부장도 그런 경우다.

이번 사건은 테이프의 숫자 만큼이나 방대한 규모여서 중심 줄기를 잡지 않으면 잔가지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벌써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테이프의 숫자, 테이프의 유출 경위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테이프에 담긴 내용의 진위가 굵은 가지 중의 하나라면, 누가·언제·누구의 지시로·불법도청을 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등을 밝히는 것이 이번 사건의 또다른 굵은 가지이다. 어두웠던 과거를 드러내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1994년 안기부의 불법도청팀인 미림팀의 재건 과정과 관련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역할은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로 주목받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비롯해, 정무수석 이원종(1993.12~96.8)-안기부장 김덕(93.2~94.12)·권영해(94.12~98.3)-1차장 황창평(93.초~94.12)·정형근(94.12~95.2)-대공정책실장 오정소(94.초~95.2, 이후 1차장으로 승진) 등은 잠적했거나 함구하고 있다. 입을 열더라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의 ‘단답형’이다.

엑스파일 관련자들, 숨거나 또는 ‘모르쇠’


김덕 안기부장이 1994년 2월 28일 오전 국회 국방위에 출석해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이종찬 기자
김덕 안기부장이 1994년 2월 28일 오전 국회 국방위에 출석해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이종찬 기자
기자가 김덕 전 안기부장을 주목한 이유는, 1993년 초 그가 문민정부 초대 안기부장으로 취임하던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 군사정권 시절의 안기부장은 대부분 군과 검찰 출신으로 통치권자의 심복들이 기용됐고, 국가의 정보기관이라기보다는 정권안보에 주력한 정치공작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국제정치 전문가인 학자를 안기부장에 임명한 것만으로도 안기부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김 전 안기부장의 취임 기자회견도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을 겨냥했다. “어두웠던 정보문화를 밝은 정보문화로 바꾸도록 촉매·산파 역할을 하겠다. 정치 사찰 기능을 과감히 이탈해 국가이익을 위해 새로운 정보를 개척해 나가겠다. 해외정보와 대북 정보에 역점을 두겠다. 국가를 위해 필요한 기능과 역할은 발전시키고 적절치 못한 기능은 축소하는 등 재조정해 나갈 것이다. 안기부를 부정적인 눈으로만 보지 말고 긍정적인 눈으로 보고 아껴달라.” 그는 “정치 사찰을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고, 국민들은 학자 출신의 안기부장이 조직을 장악할 수 있을지 우려하면서도 기대했다.

그런데 가장 비열한 방식이라는 지탄 속에 일시 중단됐던 정치사찰이 김덕 안기부장 재임 시절에 계속됐음이 최근 ‘X파일’의 등장으로 드러났다. 그가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미림팀이 재건됐고, 불법 도청이 자행됐고, 정치 공작의 무기로 활용됐다. 김 전 부장이 직접 지시를 하지 않았더라도, 또 그가 당시에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안기부 개혁’ 기대 모았던 김 전 부장

지난 2000년 12월11일 총풍사건 최종공판을 마치고 나오는 권영해 전 안기부장.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000년 12월11일 총풍사건 최종공판을 마치고 나오는 권영해 전 안기부장. 사진공동취재단
미림팀의 재건이나 불법도청 활동과 관련해 아직 밝혀진 사실은 없다. 당시 ‘황태자’로 군림하면서 각종 인사와 국정에 개입했던 김현철씨가 배후에 있었을 것이라는 유력한 추정이 있을 뿐이다. 또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김기삼(오정소 1차장의 보좌관 출신)씨를 비롯해 안기부 출신 몇몇 인사들의 인터뷰를 통해 퍼즐을 맞춰볼 뿐이다.

김 전 부장이 미림팀과 도청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에 관한 추정은 크게 엇갈린다. 김기삼씨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덕 부장은 몰랐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도청 정보들이 안기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부장을 건너뛰어 이원종 정무수석과 김현철씨에게 직보됐을 것으로 보는 견해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생리상 안기부에서 생산된 정보가 부장을 건너뛸 가능성은 희박하며, 최소한 미림팀 활동에 대해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묵인 혹은 방조를 요구받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기자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7월말부터 김 전 부장 접촉을 시도했다. 미림팀에 관해 전혀 몰랐다거나, 어렴풋이 알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거나, 안정적인 통치권 확보를 위해 내가 직접 지시했다거나, 어떤 답이든 들어야 했다. 그래서 여러차례 전화를 했고 집을 찾아갔다. 그 때마다 “외출했고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답만 들었다.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집 현관문을 지키는, 이른바 ‘뻗치기’를 하면서 그의 가족들로부터 ‘훈계’를 듣기도 했다. “귀한 시간 허비하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좋은 기사 쓰세요. 지금은 하실 말씀이 없고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네요.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겠죠.”

기자, 그의 집앞에서 ‘뻗치기’…부인 “다른 데서 좋은 기사 쓰라” ‘훈계’

물론 김 전 부장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입을 열어 “전혀 몰랐다”고 하면, “정치사찰을 근절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도 결과적으로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바지저고리’였음을 시인하는 결과가 된다. 권력 핵심부로부터 언질을 받았다면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이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직접 지시를 했다면 개입 정도에 따라 범죄행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꼴이 된다.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납작 엎드려 자신이 잊혀지기를 바라는 것이 처신술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정도일까. 김 전 부장이 미림팀의 재건과 활동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를 떠나 그의 진술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전혀 몰랐다면 안기부장을 제쳐놓고 정보기관을 사조직처럼 부렸던 이들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테고, 묵인과 방조를 지시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가 불법도청의 핵심 책임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 전 부장은 2년 가량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재직했고, 한때나마 ‘안기부 개혁’의 상징이었다. 결과를 놓고보면 자신의 의지와 한참 멀어지고 말았지만, 지금이라도 입을 열어 과거의 어두움을 떨어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 학자로서의 명예와 양심을 지키는 길이지 않을까. 뻗치기를 하는 동안, 김 전 부장의 부인인 박아무개씨에게 이런 뜻을 내비쳤지만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가서 좋은 기사나 쓰세요”라는 말을 다시 들어야했다. 정말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김 전 부장을 만나러 갔던 것인데도 말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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