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적 진실을 조속히, 정확하게 밝혀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국정원의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해 오늘에야 비로소 한마디 했더군요. 이게 얼마 만입니까. 1심 재판에서도 사진 등의 위조가 확인됐고, 그래서 무죄 판결이 난 건 지난해 8월22일이었습니다. 무려 6개월 이상 지났습니다. 그때 제대로 한마디 했다면, 이런 해괴한 증거조작 사건은 없었을 것이고, 한 젊은이의 누명도 일찌감치 벗겨졌을 텐데. 문서를 위조했다는 자가 나타나 자살 시도로 이를 고백하자 그제야 ‘한마디’를 했으니, 국민의 입장에서 대통령은 어디에 써먹는 부지깽이입니까.
그것도 ‘증거 위조 논란’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썼죠. 선거부정에 동원했던 국정원 여직원에 대해서는 젊은 여성의 인권 운운하며 피를 토하더니, 삶과 꿈을 찾아 북한 땅을 탈출한 젊은이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인색합니까. 제 자랑 할 때만 한마디 하는 게 대통령의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국민의 뜻과 원망과 분노와 꿈을 대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 모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고 6일 만이었습니다. 그때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고 했으면 될 일을, 새정치 운운하며 어떻게 해서든 그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려 했습니다. 언제부터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는 건 새정치고, 공약대로 하자는 건 헌정치였습니까? 병인지 습관인지 아니면 국민을 무시하시는 건지….
솔직히 당신이 이 사건에 대해 몰랐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 저지르긴 했지만, 당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기친람형 ‘깨알 리더십’의 당신이 어떻게 무려 6개월 이상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죠. 국가의 품격과 수사기관의 신뢰가 만신창이가 되고 난 이후에야 던진 한마디도 고작 ‘국정원은 검찰 수사에 협조하라’였습니다. 이미 거듭된 조작과 왜곡과 공작이 드러났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점잖을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물론 국정원장을 조용히 불러 자초지종을 따지고, 지청구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심 무죄 판결 이후 국정원이 한 짓을 보면, 지청구는커녕 당신의 두둔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국정원의 행태는 방약무도했습니다. 본격적인 증거조작도 그때부터 착수했습니다. 친정부 언론들은 종북 변호사, 종북 매체 등이 간첩을 비호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재판부도 종북으로 몰리는 판이었습니다.
그런 서슬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국 정부에 의해 꺾였습니다. 국정원이 증거로 제출한 문서 3건이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지난 2월 확인한 것입니다. 국정 책임자라면 그때쯤 따끔하게 한마디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침묵했습니다. 그러자 국정원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공식적으로 입수한 문건이라고 책임을 외교부에 떠넘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매끈매끈한 외교부가 그 책임을 뒤집어쓸 리 없겠죠. 장관이 나서서 반박했습니다. 머쓱해진 국정원은 이번엔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중국 쪽이 딴소리를 하는 것인 양 친정부 매체를 통해 흘렸습니다. 문서는 제대로 된 것인데, 비공식 통로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중국 정부로서는 허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투였습니다. 한 공안검사 출신의 국회의원은 중국 음모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기도 했지요. 검찰은 물론 국정원은 대놓고 증거조작 사실이 없다고 공개리에 발표하기도 했고요. 화가 난 중국 정부가 재차 위조가 확실하다고 쐐기를 박고 나섰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 공문서 위조 사기범’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당신은 침묵했죠.
그러자 국정원은 문서를 빼돌린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쪽으로 작전을 바꿨죠. 그 와중에 이른바 ‘국정원 정보원’ 김씨의 ‘자살 시도 사건’이 터졌습니다. 국정원은 김씨가 문서를 위조해 전달했기 때문에 사실로 알고 제출했을 뿐 조작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 혼자 간첩 조작 사건을 뒤집어써야 했으니 협력자로서야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만일 그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면, 이 사건은 돈이 궁한 정보원이 멍청한 국정원을 속여 만든 미지의 사건으로 치부돼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씨는 유서를 통해 아들에게 문서 조작 비용 1000만원을 청구하라고 했습니다. 국정원으로서는 발을 빼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공작은 하고 있겠죠. 대통령도 침묵하고 있으니 잘해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말입니다.
하도 거짓말과 조작과 공작을 듣고 보다 보니,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김씨가 누군가에게서 간첩 증거 조작의 잘못을 모두 뒤집어쓰고 사라지도록 강요받았던 건 아닐까? 사실 그는 한국에 있자니 간첩 조작 혐의로 국가보안법에 따라 중형을 받게 되고, 그렇다고 공문서를 위조했으니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국정원으로서는 증거 조작 사건을 미궁으로 빠뜨리는 게 최선입니다. 이판사판 막판에 몰린 김씨에게 무슨 짓은 못했을까요. 공상이라고요? 하지만 지난해 대선 때 남북 정상 대화록 내용 짜깁기 유출과 문재인 후보 종북몰이 공작, 선거 이후 1년 내내 계속된 대화록 짜깁기 공작 등을 경험했고, 중앙정보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온갖 조작 사건을 공작했던 곳이니 그런 의심은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이 국정원에 신세를 졌다고, 이토록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는 건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의 침묵은 국정원에 대한 두둔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침묵하는 사이 국정원은 온갖 조작과 공작을 했고, 검찰 사법부 외교부 국회를 농락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공포정치’에 의존했다가 참극을 당했습니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중앙정보부장의 권력을, 차지철 경호실장을 통해 통제하려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궁정동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을 살해한 건 김재규의 중정 요원들이었습니다. 김 부장이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인지 기억하시죠. “이따위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바로 되겠습니까.” 그가 버러지라 한 것은 차지철 경호실장이었죠. 당시 차 실장은 대통령의 귀를 잡고 유신체제를 종말로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누가 버러지인지는 판단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차지철이건 김재규이건 그런 사람을 권력기구의 책임자로 두고 무한권력을 행사하도록 방치한 대통령입니다. 물론 그런 기구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유신체제가 막바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운명을 재촉한 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국정원의 권세는 30~4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여당에게도 안하무인이었고, 정부기관들은 절절맸습니다. 대통령선거 때의 공헌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고삐 풀린 권력기구의 등에 당신은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야 합니다. 혹시 불행한 최고권력자들처럼 밤마다 정보기관이 직보하는 이상한 보고서만 탐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길을 들여도 맹수는 맹수입니다. 제대로 목줄을 채워야 합니다. 정보만으로도 최고의 권력인데, 거기에 수사권까지 쥐고 있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수사와 정보를 분리해야 합니다. 정보 쪽의 공작을 수사가 견제하고, 수사의 이탈을 정보가 막도록 해야 합니다. 청와대 비서관이 지방선거 예비후보들을 면접하고, 대통령이 여당 후보 지지 발언을 하는 등 불법과 반칙에 쏟을 시간과 여력이 있다면, 괴물이 되어가는 권력기관의 기틀을 바로잡는 일에 쏟으십시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