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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가끔은 물정 모르는 이가 그리워진다

등록 2014-04-14 15:26수정 2014-04-14 15:54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지난 3월18일 화상 국무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오른쪽)가 지난 4월4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기 위해 면회실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류우종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지난 3월18일 화상 국무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오른쪽)가 지난 4월4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기 위해 면회실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류우종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53
당신이 그랬듯이, 원칙주의자가 세상을 바꿉니다
물정 밝은 이명박에 판판이 당하던 그때 그 사람,
지금은 사라진 그 사람이 가끔은 생각날 것 같습니다
벌써 7년 전입니다. 옛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막바지로 접어들 때였지요. 당신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당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족벌언론들은 이미 판세가 끝났다고 판단해, 이명박 후보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연일 내놓던 이 후보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는 그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씨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면, 본선을 끝까지 치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한 너무 많은 거짓말은 결국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선거를 끝까지 치르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사실 서울 도곡동 땅 차명 보유 의혹이나 BBK 문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위증교사 의혹 등 이씨 주변은 온통 지뢰밭이었습니다. 경선 사흘 전 공개리에 박 후보 진영에서 이 후보의 사퇴를 촉구한 건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당신은 순진했습니다. 아니 물정을 몰랐습니다. 진실이 거짓을 이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이씨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당신에게 조금씩은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죠. 그러나 예상대로 경선은 이 후보의 낙승으로 끝났습니다. 거짓은 은폐된 채 드러나지 않았고, 진실을 주장했던 이들은 역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숨죽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천박한’ 이 후보와는 말 한마디 눈길 한번 섞지 않았습니다. 덕담이라도 한마디 했으면, 구박받던 동지들의 신세가 조금은 편했을 텐데도 말입니다. 고집도 대단했지만, 당신은 참으로 물정을 몰랐지요.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첫 국회연설 중에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너나 잘해’라는 막말을 들었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그는 물정을 많이 깨달았나 봅니다. 그날 저녁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바로 뭐(대통령)가 됐더라면 제대로 못했을 것.”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돼 약이 됐다. 많이 배우고 터득하고 있다.” “기업 하면서 세상에 사기꾼이 많다는 걸 처음 알았고, 여의도에 와보니 온갖 ‘잡×’이 많은 걸 처음 알았다.”

한때 그는 책상물림, 샌님 등의 소리에 발끈하기도 했습니다. 민주당과 신당 창당을 하기로 한 뒤 주위에서 ‘말아먹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그러자 “세상 물정 모른다고?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호랑이”라고 좀 허세를 부렸죠. 그로부터 불과 20여일 만에 그는 물정에 대한 무지를 시인했던 것입니다. 계면쩍게 그런 말을 하던 모습이 오히려 그동안 과장돼 보이던 것과는 달리 가장 친근했습니다.

그가 물정 모르고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기초단체 불공천을 새정치의 심벌인 양 내세웠던 일입니다. 2012년 대통령선거 때 세 후보가 함께 공약한 사항이긴 하지만, 새누리당은 이미 약속을 파기하기로 한 뒤였습니다. 현행 선거법에는 공천을 허용하고 있고, 여당은 공천을 하기로 한 마당에 제1 야당이 공직선거에서 공천을 하지 않겠다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무공천이 아니라 선거 포기였죠. 정당은 사실 선거를 위해 존재합니다. 특히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당이, 그것도 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할 야당이 구테타 상황도 아닌 평시에 선거를 포기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마저 손을 드는 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국민에게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닙니다.

결국 그는 공천을 하기로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이제는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당신의 마름들은 온갖 비방, 조롱, 야유를 쏟아부었죠. 한때 당신을 뒤에서 빈정대던, 그러나 지금은 입속의 혀처럼 굴고 있는 매체들이 신바람 나서 바람을 잡았습니다. 혹시 그 조롱을 들으며 마음이 켕기거나 귀가 간지럽지는 않았는지요? 기초선거 무공천 공약이 백지화된 것은 당신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선거법 개정은 국회 소관’이라느니, ‘자신만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없다’느니, 이상한 소리를 세상에 전했죠. 지난 7년이 참으로 길고도 험난했던가 봅니다. 그렇게 약삭빠른 이 후보도 울고 갈 정도로 세상 물정에 빠꼼이가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새누리당에선 새정치민주연합 창당을 “위장결혼, 정략결혼, 사기결혼”이라고 빈정거렸습니다. 당신의 얼굴에 떨어질 침이라는 걸 모르고 한 말이지만, 기왕에 결혼이란 이야기가 나왔으니 따져봅시다. 여야 후보의 무공천 약속은 혼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혼약이 실천에 옮겨졌다면 여야 사이에선 기초선거 무공천이라는 아이가 탄생했겠죠. 그러나 한 쪽이 파기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게 혼약입니다. 물정 모르는 남자는 혼자서라도 혼약의 순결성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종의 수절 선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라고 따지기도 하고, 울며불며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만, 이미 돌아선 여자는 눈 하나 까딱 하지 않았습니다.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자와 그런 자를 놀려먹는 약삭빠른 자,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세상이 각박해지다보니 놀림을 당한 이가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하지요. 안 대표가 그런 경우입니다. 당신도 한 때 그렇게 어리숙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빈정거림을 당했지만, 그것이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당신을 신뢰의 정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물정에 통달한 것은 물론 굴신에 자유자재한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무공천 논란은 그 상징일 겁니다.

이성부 시인은 봄을 이렇게 노래했죠.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그런 봄을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라고 빗대었습니다. 어리숙하다고 놀려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물정 모르는 원칙주의자가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 당신이 오히려 반대의 길에 우뚝 서 있으니, 봄이 미쳤나 봅니다. 물정에 밝은 이명박 후보에게 판판이 당하던 그때 그 사람, 지금은 사라진 그 사람이 가끔은 생각날 것 같습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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