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뉴타운에 열광하고 부동산 개발에 환호하던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22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서울 지역 배심원단 8명의 공통된 화두는 ‘더 나은 삶’이었다. 화려한 변화보다 “아이와 한 바퀴 돌 수 있는 작은 공원”을 선호했고, 육아 지원과 사교육비 경감 등 생활 이슈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 평가와 서울시장 후보들의 지지도에 ‘깊고 넓은’ 파장을 미치고 있었다.
■ 눈물과 개각의 파급력은?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새 국무총리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지명하고,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경질했다. 서울 지역 배심원단은 세월호 참사 수습 중에 벌어진 정홍원 총리의 사의 표명에 대해선 대부분 “무책임하다”고 비판했지만, 개각 자체에는 우호적인 모습이었다. 40대 회사원 박홍수씨는 “정홍원 총리는 세월호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의를 표명해 욕을 많이 먹었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는 관피아 척결 적임자라고 들었다. 어차피 (총리가) 바뀌려고 했기 때문에 좋은 내용인 것 같다”고 말했다. 20대 대학생 권민욱씨도 “변화가 필요하긴 하니, (총리가) 바뀐 것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은 지난 19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눈물담화’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내놨다. 8명 가운데 4명은 ‘부정적’이라고 답했고, ‘긍정적’이라는 답은 없었다. 대통령의 ‘눈물’로 새누리당 지지층이 결집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적어도 서울 지역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다. 50대 주부 이진경씨는 “박 대통령을 좋아했는데, 이번에 많이 실망했다. 담화도 가슴에 와닿지 않아 답답했다”고 말했고, 30대 회사원 강석훈씨는 “다음날 기사들이 전부 해경 해체와 눈물에 집중되어 있어 짜고 치는 각본이 아닌가 하는 실망이 들었다”고 말했다. 주된 해결책으로 제시된 해경 해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20대 취업준비생 조미연씨는 “담화를 보다가 해경을 해체한다고 하는 순간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해경 해체가 이 일의 해결책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참사는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평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서울 배심원단 8명 가운데 6명은 세월호 참사 이전까지는 박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했다’고 평가했지만, 이 가운데 3명은 세월호 참사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그 반사이익이 야권에 돌아갔을까. 배심원단 대부분이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진상규명 요구는 필요하다고 응답했지만, 세월호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촛불집회에 부정적이라고 답한 이는 5명으로 절반을 넘겼다. 50대 회사원 오승진씨는 “진상 규명은 해야 하지만 집회에 정권 퇴진 주장이 있다. 정치적 부분이 너무 깊게 들어가 있다”고 비판했고, 조미연씨도 “세월호 유족들도 진상 규명만 원할 뿐이라고 밝혔다. 지금 정부가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계속 퇴진하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 주거·복지·교육…‘삶의 질’에 관심 인구 1천만의 대한민국 수도이자 연간 예산 20조원, 공무원 5만명에 이르는 서울시는 정부의 ‘축소판’이자, 서울시장은 ‘소통령’으로 여겨질 만큼 높은 정치적 위상을 갖는다.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와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맞붙은 이번 선거는 두 후보 모두 여야의 유력한 대권 후보라는 점에서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우선 현 시장인 박 후보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배심원단 8명 모두가 “잘했다”고 평가했다. ‘소통’과 ‘세심함’이 주된 이유였다. “보도블록 잘못된 것을 신고하면 다음날 고쳐준다. 사소한 것까지 짚어서 잘하는 것 같다”(오승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들으려 하는 것 같다”(강석훈) “다들 큰 공약을 하는데, 박 시장은 작은 거에 신경 써준다”(이진경) 등의 의견이 나왔다. 표심은 어떨까. 배심원단 8명 가운데 6명이 박 후보의 손을 들었다. 2명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답했고, 정 후보를 지지하는 이는 없었다. 특이한 점은 박 후보를 지지한 6명 가운데 4명이 얼마 전까지 정 후보를 지지했거나 유보적인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정 후보 아들의 ‘국민 미개’ 발언이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친 모습이었다. 박홍수씨는 “정 후보 자녀가 지하철을 타봤을지도 의문이고, (아들에게) 지하철표 주면서 1호선 타고 환승해 4호선 역으로 나오라고 하면 못 나올 것 같다. 박 후보가 뭘 잘해서 지지한다기보다 정 후보 가족 발언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고, 아직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이진경씨도 “원래 정 후보 쪽이었는데 아들·아내 사건이 터지면서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참관인으로 함께한 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정 후보에게 ‘재벌’ ‘부자’ 이미지가 있는데, 가족들의 실언이 구설에 오르면서 ‘그러면 그렇지’라는 부정적 평가가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배심원단은 두 후보의 공약 가운데 토건·개발 공약보다 복지 공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정 후보는 ‘직장 어린이집 확대’ ‘무한돌봄제도 시행’ 공약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박 후보는 ‘초미세먼지 20% 감축’ ‘공공노인 요양원 30곳 설치’ 등이 관심을 받았다.
서울 지역 배심원단 절반 이상은 ‘전월세 관련 주거 안정’을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로 꼽았다. 강석훈씨는 “맞벌이 부부라 소득이 적은 편이 아닌데도, 올라가는 전셋값 따라가려면 손가락만 빨아야 감당할 수 있다. 또 2억 미만의 돈으로는 지은 지 20년 안 된 아파트에는 못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어 육아·보육시설 확충 등 맞벌이 부부를 위한 육아 지원과 공교육 회복 및 사교육비 경감도 주요 정책 의제로 꼽혔다. 김은영씨는 “과학고나 영재고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새벽 2시, 3시까지 주택가로 가서 사교육을 받고 집에 간다. 공교육 내실을 다져서 그런 상황을 바로잡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와 잇따른 지하철 사고 등으로 시민들의 불안이 높아지면서, 안전 문제에 대한 관심도 높았고, 미세먼지 감축 등 환경문제 해소 역시 차기 시장에 바라는 과제로 꼽혔다. 고원 교수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접근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떤 것이 좋은 사회이고 어떤 것이 필요한 정책인가에 대한 생각은 놀랍게도 유사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서울이 (한국 사회) 변화의 선행지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끝>
최혜정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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