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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죽어가는 게 어디 법치주의뿐이겠습니까

등록 2014-09-15 15:17수정 2015-03-24 18:42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사건에 대한 1심 선고 뒤 수행원과 취재진에 둘러싸여 법정을 나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사건에 대한 1심 선고 뒤 수행원과 취재진에 둘러싸여 법정을 나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법치주의 짓밟고 ‘사람의 지배’ 불러온 ‘원세훈 판결’
국회는 ‘세월호 특별법’ 미뤄둔 채 ‘가사 상태’에 빠져
겉으론 “민생, 민생” 떠들며 ‘서민 증세’로 민생 죽여
군대에 간 젊은이들은 죽어서 나오거가 폭력에 찌들어
대통령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지…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74

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거법 위반 무죄 판결을 보고 한 판사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는 죽었다’고 개탄했습니다. 사법부의 허리라 할 현직 부장판사가 그렇게 한탄했으니, 그 파장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 이범균 부장판사의 판결은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기본 원칙인 ‘법의 지배’를 짓밟고, 봉건왕조나 절대왕정에서 이루어지던 ‘사람의 지배’로 퇴행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입만 열면 ‘법치’를 외쳤습니다. 한 부장판사가 당신을 ‘법치를 죽이는 장본인’으로 찍었지만, 당신은 여전히 ‘법치’를 입에 달고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법치의 죽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각이나 해보시기 바랍니다.

법치주의의 붕괴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선 사이비 법치주의입니다. 권력자가 입법부를 무력화시키거나 예속시킨 뒤 멋대로 법을 만들어 국민의 기본권을 통제하는 경우입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그런 경우이고, 우리나라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체제가 그랬습니다. 박정희 체제는 아예 긴급조치라는 ‘변태적 법체계’를 만들어 대통령 1인 지배를 고착시키려 했습니다. 전두환 체제는 입법회의라는 임의기관을 만들어 법을 멋대로 생산했습니다. 모두 법치의 탈을 쓰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파시즘의 비극을 겪은 뒤 실질적인 ‘법치’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게 되며, 모든 법률은 헌법의 최고 법가치를 실현할 때에만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실질적 법치주의’를 정착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잔꾀 많은 권력자들은 잇따른 사이비 법치주의의 비극을 겪고 나서도 실질적 법치주의를 질식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헌법적 가치를 담고 있는 법률이라도, 법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자들, 법을 집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정신과 가치를 훼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대로 온전한 법은 장신구로 만들어버리고, ‘사람의 지배’를 관철하려는 것이니 그 교활함은 이전의 독재자보다 더 간악합니다. 이런 ‘사람의 지배’는 검찰을 권력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시작해, 사법부가 권력 앞에서 알아서 기는 것으로 완성되곤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검찰을 사냥개처럼 부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법치주의를 반쯤 죽여 버렸죠. 뒤를 이은 이 정부는 사찰과 공작을 통해 검찰총장을 벌거벗겨 내쫓아 검찰을 확실한 ‘권력의 개, 혹은 몽둥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찰과 공작이라는 그 ‘보이지 않는’ 채찍과 입신영달이라는 당근으로 사법부를 납죽 기게 만들었습니다. 실질적 법치주의의 확실한 죽음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를 확인해주기라도 하듯 대법원은 불과 3시간 만에 김동진 부장판사의 글을 법원 통신망에서 직권 삭제하고, 그가 ‘법관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 의무 규정을 위배’한 것으로 보고 진상 파악에 나섰다고 합니다.

지난달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에 설 수 없었다’고 말해 감동과 함께 반성의 기회를 준 바 있습니다. 대법원의 이번 조처는 그런 교황을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으로 종교재판에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정치권력의 통제를 넘어서 법원이 알아서 검열하고 통제하는 것이니 법치주의의 실질적 사망 선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가운데)이 1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선고를 받은 뒤 취재진을 피해 법정을 나서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과 이를 막는 수행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자 비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가운데)이 1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선고를 받은 뒤 취재진을 피해 법정을 나서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과 이를 막는 수행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자 비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문제는 이 정권 아래서 죽어 나가는 게 이런 법치주의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입법부는 지금 ‘가사 상태’가 되었습니다. 국회는 세월호 참사 이래 기능 정지 상태로 5개월째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 딸랑이 언론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국회를 죽였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료와 기업의 더러운 유착 속에서 세월호가 침몰하고, 이 정권의 무능과 무책임 속에서 300여 생명이 서서히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는데, 세월호 문제를 덮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 정권은 ‘국가 개조’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후속 조처의 출발이라 할 진상규명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막고 있습니다. 국회 국정조사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부속실장의 청문회 증언을 놓고 실랑이하다 흐지부지됐습니다.

대통령에게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손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특별법 제정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이른바 민생 법안이란 것들의 처리도 끝났을 것입니다. 특별법은 제쳐두고 다른 민생 법안부터 처리하자고 하는 것은 특별법 제정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정치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입니다. 그걸 외면하고 배제하면서 다른 민생을 말할 순 없는 일입니다.

죽은 것도 살리는 게 정치라는데, 이 땅의 정치는 아예 누워서 일어날 줄 모릅니다. 새누리당은 청와대가 정해준 가이드라인 안에 갇혀 있습니다. 딸 문제 등 허물이 많은 김무성 대표는 청와대의 지침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데 청와대와 맞설 수 없을 것입니다. 야당더러 청와대 지침 안에서 특별법 논의를 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무리 검찰이 국회의원들을 잡아들이는 등 압박을 가한다 해도 야당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명박 정권도 수용했던 특별검사의 야당 추천을 이 정권은 왜 못하겠다는 것인지 대통령은 말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민생, 민생” 떠들지만 정작 민생을 죽이고 있는 건 이 정부입니다. 경기 침체와 부자 감세로 세수가 부족해지자 담뱃값을 왕창 인상하겠다고 하니 민생을 어쩌자는 것입니까. 4000원으로 인상해 국민의 주머니에서 3조원을 더 털어내겠다는 것인데, 그러고도 서민 생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흡연율은 소득이 낮을수록 높아지고, 소득이 낮을수록 담뱃값이 생계비에서 차지하는 비율(3%)이 높아집니다. 이제 주민세, 자동차세까지도 줄줄이 인상하겠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민생 운운하는 걸 보면 양의 탈을 쓴 늑대나 다름없습니다.

교육은 이제 회생하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정부는 오로지 전교조 죽이기와 근현대사 왜곡에만 열중하고 있어서, 다른 모든 교육 현안은 고박이 풀린 채 이리저리 휩쓸리는 세월호 화물 신세가 되었습니다. 비리재단을 비호하다 보니, 겨우 되살아난 사학들이 다시 분규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중등교육의 암덩어리가 되어 버린 자사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부 시도 교육감의 노력을 정부가 ‘지옥 사자’처럼 막아서고 있습니다. 교육은 그야말로 침몰하기 직전의 세월호입니다.

외교·안보·국방 분야는 아예 무위(無爲)를 방책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간 젊은이들이 죽어서 나오거나, 폭력에 찌들어 나옵니다. 선임이 후임을 변태적으로 가학하고, 후임은 선임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군대는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남북의 대치는 물론 한반도 주변 열강의 각축은 갈수록 거세지는데, 나라의 안전판을 튼튼히 할 이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증발한 지 오래입니다. 오로지 미국만 바라보고 있지만, 미국은 우리를 일본 열도와 미국 본토를 지키는 전진기지로만 이용할 뿐입니다. 언제 하늘과 바다, 땅이 뚫릴지 걱정입니다.

게다가 이 정권은 세월호 참사마저 정쟁으로 비화시켜, 국민을 이편저편 나누어 싸우도록 부채질했습니다. 이 정권의 후원자들을 동원해 유족들 앞에서 증오와 패륜의 범죄마저 저지르며 유족과 시민들의 슬픔과 고통을 희롱하고 조롱하도록 했습니다. 당장 세월호 문제를 정쟁화해 그 부담을 회피하려는 잔꾀이지만, 그건 집안의 대들보에 톱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륜은 나라의 대들보입니다. 대들보가 부러지면 집이 내려앉듯이, 인륜을 짓밟아 국민을 분열시키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패륜아들과 어떻게 한 하늘을 이고 살 것이며, 어떻게 그런 자들과 수렁에 빠진 나라를 함께 끌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그런데도 대통령은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300여명이 갇혀 있는 세월호가 침몰할 때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혹은 어딘가에서 다른 일을 했던 것처럼, 이 나라의 표류와 침몰을 방관하고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갈 길은 먼데 날은 일찌감치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숨만 짓지만, 더 어두워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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