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사과담화를 발표하는도중 사건희생자의 이름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박근혜 대통령. 이정용 기자 lee312@hani.o.kr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76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을 발족시켰을 때 느낀 혼란은 단지 법체계상의 문제에 그치는 건 아니었습니다. 검찰이 나의 ‘명예 감정’을 대신 느껴주고, 대신 정리하고, 대신 복수하겠다고? 어쩌다 나와 이 나라 국민은 제 명예가 훼손되는지 여부를 느끼지도 판단하지도 못하는 그런 바보가 되었나. 언제부터 대통령은 나의 감각과 이성의 뇌수가 되고, 수사기관은 나의 신경다발이 되었나.
친구가 내민 선의의 손길도 상황에 따라 좋을 수도 역겨울 수도 있는 게 나의 감정입니다. 욕이라 해도 관계에 따라서는 애정의 표시가 될 수 있고 저주가 될 수 있는 게 나의 감정입니다. 그런 명예감정의 훼손 여부는 본인만이 느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부모 형제라도 나 대신 느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를 모욕한 자에 대한 처벌 역시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다른 사람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국가기관이 대행하겠다고?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그런 의혹 제기에 대해 분노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달리 느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혹 제기에 대한 감정의 주체는 박 대통령 개인일 뿐입니다. 그만이 상심의 깊이를 느끼고 알 수 있으며, 처벌을 원하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섬세한 사람이라도 그의 느낌을 대신할 수 없으며,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국가기관이 아니라 신이라도 처벌하겠다고 나설 수 없습니다.
단순한 무지인지 혹은 맹목적인 분노 때문인지 당신은 그런 법치의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를 다시 한번 짓밟았습니다. 개인의 감정 상태를 수사기관이 관장하도록 한 것입니다. ‘국민의 명예 감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짐과 이 정부가 대신 느끼고 판단하고 처벌도 하겠노라.’ 지난 16일 당신의 발언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이버상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성 발언이 사회의 분열을 가져온다. 이런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한다면 국민들의 불안이 쌓이게 돼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앞으로 법무부와 검찰이 이런 행위에 대해 철저히 밝혀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검찰은 이틀 뒤 서울중앙지검에 ‘사이버상 명예훼손 전담수사팀’을 설치했습니다. 그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도 잘 알 겁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이버상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모욕을 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게다가 모욕을 준 것은 다름 아닌 국가기관이었습니다. 검찰이 지난해 발표한 모욕의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문재인 안철수 자위행위 묘사 충격 그림 보니….”
“통진당 이정희가 대통령 선거에 나온단다. 누구랑 ‘스와핑’을 하려고? 언놈과 붙어먹으려고 나왔을까?ㅋ”
“문재인은 확실히 종북이나 안 후보는 주변이 온통 종북입니다. 종북 박원순 시장(김일성 만세 외칠 수 있다고 주장)을 지지한 서울시장은 국가 기밀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가 종북이니 간첩사건이 또다시….”
“대통령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 찰쓰나 재인이가 대통령 할 바에 차라리 개나 소를 시키세요. 둘보다는 나을 겁니다. 진짜로요.”
“문재인 대북관은 종북을 넘어서 간첩 수준이었다.”
“문재인 부친이 북괴 인민군 장교 출신???”
2012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사이버 공간을 오염시켰던 것들입니다. 당시 이런 내용의 글 수십, 수백만건이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 요원들에 의해 작성되거나 리트위트됐습니다. 다른 선거운동 조직들에 의해 살포된 것까지 합치면 천문학적인 수치였습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렇게 한 개인이 국가기관에 의해 모욕을 당할 때 당신은 무어라 했습니까. 그리고 대통령이 된 뒤 어떤 조처를 취했습니까.
‘국정원 댓글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하영씨(맨 오른쪽) 등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이 지난해 8월19일 오전 청문회장에 설치된 가림막 뒤에서 손을 든 채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런 짓을 한 국정원 요원이 현장에서 붙잡혔지만, 당신은 젊은 처녀에 대한 인권유린이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를 포함해 그런 짓을 한 국정원 요원들이 체포되고 기소되자, 검찰총장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이 정부는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국론을 분열시키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고, 법치주의를 유린했는데도, 이들에 대한 처벌을 막은 게 이 정부입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사이버상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성 발언이 사회의 분열을 가져온다. 이런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한다면 국민들의 불안이 쌓이게 돼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자신과 경쟁하던 대통령 후보를 그렇게 묵사발 만든 자들을 무죄 방면하고도 사이버상 국론 분열, 사회 분열?
사실 개인의 명예 감정까지 국가가 관장하겠다고 할 때 더 끔찍했던 건 바로 그런 자의성, 편향성, 왜곡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대통령과 이 정권에 불리한 것만 골라 징치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국가모독죄’를 제정했던 유신체제가 이보다 더 민주적이지 않았나 싶은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때는 적어도 개인의 명예 감정 처리를 국가가 대행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으니까요.
국가모독죄는 해외에서 유신체제와 유신헌법에 대한 비난을 막기 위해 제정됐습니다. 그 후 대통령도 국가기관이라는 핑계를 대며,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봉쇄하는 도구로 이 조항을 이용했죠. 민주화와 함께 가장 먼저 철폐된 건 그런 시대착오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개인의 감정까지 국가가 멋대로 관장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모독죄를 부활하거나 할 일이지, 지극히 사적인 명예훼손죄를 국가 통제에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그 배경은 역시 ‘대통령의 7시간’ 논란을 포함해 대통령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7일 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문제의 ‘산케이 보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송은 제3자(자유청년연합)의 고발로 이미 시작됐지만 소송 주체에 따라 법적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우리는 엄정하게 끝까지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 나흘 뒤 민경욱 대변인은 이렇게 말을 바꿨습니다. “제3자가 고발한 내용에 대해서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직접 대응을 안 할 수도 있다는 뜻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쉽게 답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청와대는 직접 책임을 묻는 걸 포기한 듯합니다.
검찰이 “온라인 모니터링”을 시작하겠다고 한 뒤 커뮤니티 등에서 우려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왜 그랬을까요. 당사자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고소했을 경우, 보도 내용이 거짓인지 여부를 다퉈야 합니다. 지금처럼 ‘경내에 있었다’는 말 한마디가 아니라 그 시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추궁당해야 합니다. 사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사후 모두 공개되는 게 원칙입니다. 특히 당신은 대통령과 국민을 일체화했으므로 더욱 철저하게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3자의 고발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건 윤 수석의 말대로 법적 의미가 다릅니다.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처벌하려면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야 하니까요.
지금 제기되거나 혹은 앞으로 제기될 대통령에 대한 의혹이나 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일이 고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상한 단체들을 동원해 고발하도록 할 수도 없고, 그러니 검찰이 알아서 봉쇄하거나, 그 서슬에 국민들이 입을 다물거나 하라는 것일 겁니다.
지난 19일 문재인 의원은 익명의 네티즌 7명을 고소했습니다. 이들은 ‘문 의원이 박원출 전 한국조폐공사 사장과 함께 20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세탁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글들을 퍼뜨렸습니다. ‘열린우리당 영입을 위해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의 공무원 성적 조작 의혹을 덮어줬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이도 고소했습니다. ‘문 의원이 청와대 비서실장 재직 때 세모그룹의 부채 1800억원을 탕감해줘 유병언의 재기를 도와 세월호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도 고소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감내할 한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자신의 명예는 자신이 지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규정된 것이 형법상 명예훼손죄입니다. 대통령이건 국회의원이건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번거롭다고, 여차직하면 치부가 드러날 것 같다고 법을 비켜서 처벌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이 나라 공익의 최고 대변자인 검찰을 자신의 심기를 경호하는 기관으로 추락시키는 일입니다.
나아가 저와 의견을 달리하는 국민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이니, 대통령이 할 일이 결단코 아닙니다. 여러 면에서 대한민국의 품격이 땅에 떨어지고, 인간적 삶의 조건들이 무너지고 있지만, 국가모독죄 이전의 야만 상태로까지 이 나라를 퇴행시키지는 말기 바랍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