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 우리 사회를 구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미래를 국민들에게 묻는 대토론의 장이 열려 참석했다. 최근 안양시 연성대학교 컨벤션홀에서 열린 국민대토론회다. 이날 토론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254명의 토론자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의제들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남녀노소, 계층에 관계없이 10대 청소년부터 70대 어르신까지 원탁테이블에 둘러앉아 1박 2일 동안 출산정책과 복지재정, 저성장 시대 일자리 창출, 미래공동체 발전을 위한 방안 등을 놓고 열띤 토의를 이어갔다. 이 토론회는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가 주최했다.
■미래세대가 모여 미래의제를 논하다.
그동안 많은 토론이 열렸지만 막상 미래 세대들이 자신의 의견을 펼칠 기회는 찾기 힘들다. 이번에는 미래 유권자들인 중고등학생 60명이 직접 참여해 자신들이 이끌어갈 미래의 의제들에 대해 당당하게 목소리를 냈다.
왜 하필 미래의제일까? 토론회를 기획한 은재호 국민대통합위 국민통합지원국장은 “미래를 이야기하다보면 현재의 갈등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문제에 집착해서는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갈등의 실타래를 좀처럼 풀기 어렵다.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미래의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대안을 모아가는 과정에서 현재의 갈등도 차츰 풀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져왔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논의에 시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254명의 일반토론자들은 1박 2일 동안 4개의 주제를 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4개의 주제는, 수차례의 면접조사, 인터넷 조사 등을 통해 사전에 선정되었다. 토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주제별로 전문가 1~2명이 상호 토의를 하고 일반토론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다. 전문가들은 해당 주제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가진 이들로 선정되어 일반토론자들에게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주고 판단을 돕는다. 이어서 토론의 핵심인 모둠토론회. 하나의 모둠은 약 10명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자리에서 토론자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가능한 대안도 모색해본다.
■4대강, 자원외교 등 예산낭비부터 막아야
4개 주제 중 가장 열띤 토론이 이뤄진 것은 저출산 고령화시대 인구정책과 복지재정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법 제도 개선이 우선, 이에 대한 요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은 물론 남성의 육아휴직도 보장해야 한다, 탄력근무·재택근무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육아로 인해 경력단절된 여성이 재취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직장 및 지역 내에 보육시설을 확충해야 한다, 자녀 수만큼 세금지원을 해야 한다 등등.
기업에 대한 요구도 빠지지 않았다. 인력을 채용할 때 학벌을 따지지 말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다. 명문대 진학을 위한 교육비 부담이 출산 기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에 대한 요구 외에 국민들의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젊은층들이 개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결혼, 출산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구다.
복지정책과 재정문제에 대해서는 토론자들의 관심이 투명한 예산 집행으로 집중되었다. 이날 토론자들은 복지 예산 부족을 탓하기 전에 더 많은 정보 공개, 시민들의 감시를 통해 예산이 불필요한 데로 새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등 대규모 예산 낭비만 바로 잡아도 가용한 복지 자원이 늘 것이라는 주장도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 보편복지를 둘러싼 논란도 뜨거웠다. 아이들에게 눈칫밥 먹여서는 안된다며 보편복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저소득층에게는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이 이뤄져야 한다는 ‘선택적 복지’ 주장에도 많은 토론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출산 문제와 복지예산이 30대 이상 연령층에서 관심이 높은 주제라면 10대와 20대 청년들에게는 저성장 시대 일자리 창출 방안에 관심이 쏠렸다. 직업 및 취업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특성화 및 직업전문학교를 강화해야 한다, 이제는 평생직업 관점에서 진로설계를 유연화해야 한다, 중소기업 대기업간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기업에 임금지원 등을 해야 한다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전체적으로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역할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은 반면에 해고 등 기업이 더 많은 자율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별 공감을 얻지 못했다.
■토론으로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
토론참가자들에게는 동일한 내용으로 두 번에 걸쳐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첫 번째 조사는 토론이 시작되기 전에, 두 번째 조사는 1박 2일의 토론을 마친 후에 시도되었다. 토론이라는 숙의과정을 거친 후 실제 의견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시도다. 대표성을 갖춘 인구집단과 심도있는 토론, 토론을 통한 의견 변화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사실상 공론조사를 시도한 셈이다.
실제 토론전과 토론 이후에 의견 변화가 일어났을까? 여러 대목에서 의견 변화가 나타났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우리사회가 가야 할 복지의 방향에 대한 의견이다. 세금을 더 많이 내서라도 복지를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복지를 줄이고 세금부담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토론회 시작 전 조사 결과는 ‘중부담 중복지’ 61.4%, ‘고부담 고복지’ 27.9%였다. ‘저부담 저복지’는 6.6%에 불과했다. 토론을 거치고 난 이후에는 ‘중부담 중복지’가 67.2%로 6.8%포인트나 상승했다. ‘저부담 저복지’도 15.5%로 8.9%포인트 상승했다. ‘고부담 고복지’만이 토론전과 비교해 12.2%포인트 하락했다. 복지예산에 대한 토론을 통해 복지재정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난 이후 현실적 대안으로 ‘중부담 중복지’ 쪽을 택한 이들이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복지를 위한 증세 의향 여론도 토론을 거치면서 크게 달라졌다. 복지 확충을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는지에 대해 ‘더 낼 의향이 있다’는 의견이 토론 전에는 58.7%였으나 토론을 거친 후에는 66%로 늘어났다. ‘더 낼 의향이 없다’는 의견은 토론전 40%에서 토론 후 34%로 감소했다. 복지확대라는 시대적 흐름속에서 우리사회도 이제 증세 논의를 미룰 수 없다. 문제는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 세금의 투명한 운용에 대해 이제라도 정부가 국민들에게 충분히 정보를 주고 동의를 구하면서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간다면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는 토론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효능감
바야흐로 토론의 시대다. 토론은 의견의 ‘다름’을 차이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우리나라는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떨어졌기에”(한광옥 위원장) 미흡한 과정을 내실있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토론은 시민들이 공적인 이슈들에 대해 의견을 형성하고 합의해가는 참여의 과정이기도 하다. “토론을 하다보면 나의 생각이 바뀌고 다른 이의 생각도 바뀔 수 있기에 좀처럼 합의하기 어려웠던 갈등적 사안도 토론을 하다보면 어느새 타협의 실마리가 보이기도 한다.” 국민대토론회 진행을 이끈 이강원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소장의 발언이다. 토론이란 이렇듯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과정이며 우리사회가 더 큰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토론을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오늘 나온 결과들이 정치나 정책에 반영이 될지 의문이다”는 한 토론자의 평가처럼 토론이 실제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는 효능감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생색내기용 이벤트성 행사로 그칠 위험성도 있다. 단순히 토론을 했다는 자족감이 아니라 토론의 결과들이 정치에 반영되고, 우리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토론의 존재 이유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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