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세상을 떠난 탤런트 김자옥은 ‘공주’였다. <공주는 외로워>란 앨범이 60만장이나 팔리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노래 가사는 이런 식이다. “거울 속에 보이는 아름다운 내 모습 나조차 눈을 뗄 수 없어. 세상에 어떤 예쁜 꽃들이 나보다 더 고울까.” 엄청난 ‘자뻑’이다. 그런데 밉지가 않다. 오히려 귀엽다. 그건 ‘내가 잘났다고 해도 미워하지는 말아줘’라는 애교와 능청이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네가 소중한 만큼 나도 소중해. 내가 소중하니 너도 소중하게 대해줄게.’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너와 내가 다같이 존중받는 것이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서 김자옥은 ‘짐꾼’ 이승기를 결코 부려먹지 않는다. 오히려 이승기에게 “너는 내 아들 같아. 승기를 보면 우리 아들이 생각난다”고 다감하게 대한다. 이승기가 식당에서 선글라스를 놓고 나오자 이를 살뜰하게 챙겨준 이도 김자옥이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김자옥을 떠나보내며 “엄마 같고 누나 같고 친구 같은 공주”라고 애도했다. 하지만 이런 심성은 김자옥이 ‘짝퉁 공주’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진짜 공주’들은 많이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과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 말이다.
정윤회 사건이 터진 데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겪은 배신의 아픔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들이 많이 나온다. 그 상처 때문에 문고리 3인방 등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쓰면서 밀봉 인사나 비선 권력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날 때의 슬픔과 분노를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번 배신하고 나면 그 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면서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어떤 배신을 당했는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있는 듯 마는 듯했던 최규하 대통령이 그랬을 리는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양아들이라고 불렸던 전두환 대통령도 박정희를 매도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모른 척할 수도 있었던 거금 9억원을 박근혜에게 선뜻 건낸 점은 둘 사이의 친분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의 배신감은 상실감에 가깝다.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다가 갑자기 조명이 꺼졌을 때 느끼는 공허감 말이다. 세상사 쓴맛 단맛 다 보고 스스로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갑작스런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그런 근육이 형성돼 있질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진다는 걸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타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관점이 결여돼 있었다. 그러니 세상사를 충성 아니면 배신의 잣대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 진짜 실세는 진돗개”라고 말한 것도 그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진돗개는 충성의 표상이다. 충성하는 자에게만 자신의 권능을 나눠준다는 무의식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 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런 인간관은 결국 많은 사람들의 등을 돌려세우고 있다. 전여옥부터 시작해서 김종인 이상돈 등을 거쳐 최근의 유진룡 장관과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까지 쓸쓸한 이별이 줄을 잇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말레이시아 총리를 기다리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에게 수평적 관계망이 빠져있는 건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결핍일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이미 최고 권력자의 딸로 성장하면서 평범한 인생들이 거치는 희로애락의 과정을 빠뜨린 것이다. 2년 전 대통령 선거 때 찬조연설자로 나온 박 대통령의 친구가 있었다. 성심여중고 6년 동창에 대학시절까지 같이 보냈다고 하니 깊은 인연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묘사하는 박근혜는 그저 대통령의 딸일 뿐이지 인간 박근혜는 없었다. 잡곡이 많이 섞인 도시락, 엄마 옷을 줄여만든 미니스커트 등 대통령의 딸로서 보인 소박함만 나온다. 소녀 박근혜는 정물화 속 꽃병처럼 놓여있을 뿐이다. 남의 눈을 피해 골목길 빵집에서 남학생들과 데이트도 해보고, 선생님 몰래 수업을 빼먹기도 하면서 또래들끼리 느꼈을 법한 공감과 동류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정을 얻기 위해 베풀어야 될 배려에 대한 경험이 그의 인생에는 송두리째 빠져있다.
조현아 부사장의 성장과정은 아는 게 없다. 하지만 그가 전통의 명문 귀족학교인 경기초등학교를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그의 경험폭을 짐작할 뿐이다. 경기초등학교는 삼성가의 이재용·이서현, 신세계의 정유경, 이명박 대통령 아들 이시형, 전두환 대통령의 차남 전재만, 노태우 대통령의 딸 노소영 등이 나온 학교다. 1년 학비만 천만원쯤 하나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액수다. 명문가 자제들끼리는 동등한 관계를 맺겠지만 울타리 밖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었을까 싶다. 칼바람이 이는 케네디 공항 활주로에 내동댕이 쳐질 때의 모멸감을 조 부사장은 느낄 수 있을까. 아니 그러고도 “제발 잘리지만 않게 해달라”고 속으로 애원했을 사무장의 절박함을 들을 수 있었을까. 이런 결핍으로는 객관적인 사태파악이 불가능하다. ‘무늬만 사퇴’를 하는 걸 보니, 국민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는 모양이다.
두 공주가 성장기 때 놓쳐버린 것을 이제서 회복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부족한 게 뭔지 알아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건 더 큰 불행을 낳을 것이다. 연말이다. 여고 동창들 가운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을 불러 수다도 떨고 노래도 불러보는 거다. 김자옥의 <공주는 외로워>가 제격이다. 그 앨범에는 “어느날 여고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변치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라는 가사의 <여고시절>이 실려있다. “너희들 나보고 공주라 하지만 빛좋은 개살구라는 옛말이 있듯이 자옥이는 외로워”라는 <세상의 모든 딸들>도 있다. ‘자옥이는 외로워’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불러보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다시 세상을 향해 겸허한 자세와 베푸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