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19일 오전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사건 선고를 위해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정희정권 국시였던 ‘반공주의’
‘종북 엄단’으로 되살아나
헌재 등에 업고 진보세력 위협
민청학련 피해자 유인태
“역사가 40년 전으로 돌아갔다”
‘종북 엄단’으로 되살아나
헌재 등에 업고 진보세력 위협
민청학련 피해자 유인태
“역사가 40년 전으로 돌아갔다”
40년 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다. 중정이 기획한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에 1000여명이 연루됐고, 180여명의 민간인이 비상군법회의에 기소됐다. 이듬해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20시간 만에 형 집행을 당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는 이날(1975년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인혁당은 세상이 다 아는 공산당”이라며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아무리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말했다.(1975년 2월 문공부 연두순시 발언)
박정희 시대의 국시였던 반공은 2014년, ‘종북 엄단’으로 되살아나, ‘합법적 절차’를 통해 통합진보당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20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역사적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 헌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1972년 유신헌법에 들어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비롯한다. 이때의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의 대척점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자에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을 벗어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쿠데타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측면이 강하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유신체제엔 없었던 진보 세력이 제도권 정치로 들어온 데 대해 반체제 세력이 국가질서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박 대통령이 언급한 자유민주주의는 반북주의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신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물론, 정보기관에 의한 조작과 사형 집행이 이뤄진 인혁당 사건과 헌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진 헌재 결정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긴 힘들다. 무엇보다 통합진보당 스스로가 ‘종북’이라는 사슬을 끊지 못해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측면도 강하다. 또한 2014년 한국 사회는 1974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된 ‘제도적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언론 자유도 과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비해 후퇴했지만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더 정교한 방식으로 ‘역사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위험해 보인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유인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헌재 결정에 대해 “역사의 시계가 4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여론조사를 보면 진보당 해산에 찬성하는 국민은 60% 정도인데, 헌법재판관들은 (90%가 넘는) 8 대 1로 해산을 결정했다”며 “박 대통령이 말한 ‘역사적 결정’은 일반 국민들의 판단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일반적인 법 감정과도 괴리가 있다”고 짚었다. 조 교수는 “정부는 공안검찰 출신 2명을 비롯해 대부분 사법 관료 출신으로 채워진 헌재가 진보당 해산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이번 결정은 1987년 헌재가 신설된 취지를 넘어 오히려 ‘국가안보기관’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헌재를 통해 공안통치가 실현되는 역설을 막기 위해선 헌재 재판관이 사법 관료에서 충원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짚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를 ‘정치의 사법화’가 갖는 문제라고 본다. 그는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 댓글사건 등 정권의 정당성 위기를 속죄양 찾기를 통해 헤쳐나가는 동시에 정치의 문제를 법의 영역으로 돌려 우리 사회를 탈정치화했다”고 말한다. 또 “민주적 정당성이 약화된 정권은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 정당성을 가지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번 헌재 결정은 수십년간 지속된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보수의 인식체계가 ‘종북’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얼마나 빨리 우리 사회를 과거로 되돌릴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한국전쟁이라는 집단적 트라우마가 예민하고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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