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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21세기판 보도연맹사건을 꿈꾸는가

등록 2014-12-22 15:48수정 2014-12-22 20:35

1950년 7월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있다. 이 당시 열흘 가까운 기간 동안 모두 4000여명이 희생됐다.
1950년 7월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있다. 이 당시 열흘 가까운 기간 동안 모두 4000여명이 희생됐다.
이승만 정권, 6·25 일어나자 좌익사범 무차별 학살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신 보도연맹’ 부활 우려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87

헌법재판소에 의해 통합진보당이 해산된 날, 어떤 이는 1972년 유신 전야, 어떤 이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조봉암 선생 사형과 진보당 말소 등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6.25 전쟁 초기 벌어진 ‘보도연맹사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국가 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말입니다.

물론 통합진보당 지도부가 저지른 과오를 두둔하는 건 아닙니다.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경기동부연합 출신들이 보인 당 운영의 반민주성과 폭력성, 패권주의는 과거 독재 정권 담당자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이 친북 패권주의와 폭력성과 결별하지 못한 것도 이들에 대한 기대를 접게 했습니다. ‘당명’에 삽입한 ‘진보’란 말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들은 결코 약자의 편도 아니었고, 정의롭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런 정당이라도 심판은 국민에게 맡겨야 한다는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헌재 결정은 우리 헌법이 지키려는 정치적 결사의 자유와 정당 정치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헌재에 정당 해산 여부를 심판하는 권능을 부여한 것은 행정권의 부당한 압력과 침해로부터 정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 정당의 존립을 재단하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재판관들의 편견과 예단이 그대로 반영되고, 정권의 주문이 그대로 수용된 심판 과정은 민주 사회가 가장 경계하는 ‘인민 재판’의 본보기였습니다.

세계헌법재판기관 협의체인 ‘베니스 위원회’가 이번 해산 심판 결정문을 요구했다니, 그런 무모함과 독선에 대한 국제적인 시선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베니스 위원회는 이미 정당 해산 심판 제도가 ‘극히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권고를 이미 각국 헌법재판기관에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시비를 따지는 건 한가한 일일지 모릅니다. 이 정권은 설사 베니스 위원회에서 부당하다는 권고를 한다 해도, 한반도 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미 국제노동기구나 국제인권협약 등의 권고를 무시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더군다나 헌재 결정 이후 해산된 당 지도부와 당원에 대한 광범위한 억압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이 부실한 헌재 결정을 인용한다면, 이들을 ‘이적단체’ 차원을 넘어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이른바 부역자들에 대한 사냥도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6.25 전쟁 초기 발생한 보도연맹사건은 그런 극단적 경우였습니다.

해방공간에서 이 나라 국민들은 국가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놓고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습니다. 친일파도 있었고 독립운동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좌익을 배척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소외시켰습니다. 특히 물리적으로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과 맞섰던 좌익 사범들은 보도연맹이라는 전향자 단체에 등록시켜 관리했습니다. 말이 보호단체지 실은 요시찰 대상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단체였습니다. 일제가 ‘불령 선인’에 대해 쓰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던 것입니다.

보도연맹에는 좌익사범만 강제로 가입시킨 건 아닙니다. 그 가족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한 사람들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친일파가 대다수였던 군경이나 우익단체 관계자와 사이가 안 좋은 이들까지도 강제로 포함됐습니다. 보도연맹 회원들에게는 공민증이나 도민증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낙인이나 다름 없는 보도연맹증만 주었죠. 그런 이들의 숫자가 무려 30만여명에 달했습니다.

6.25 전쟁이 나자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예비 검속’ 했고, 북한군이 밀려오자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군경은 물론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체까지 이들을 죽이는데 동원됐습니다. 일가친척이 무고하게 살해된 것도 억울한데, 생존한 그 가족까지 연좌제를 적용해 사찰하고 취업을 제한하는 따위의 범죄는 계속됐습니다.

통합민주당 당원은 10만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당비를 꼬박꼬박 내는 진성당원만 3만여 명에 달하고요. 이제 그들은 폭력으로 북한의 체제를 이 땅에 세우려고 했던 자들로 규정당했습니다.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은 물론 ‘아르오’와도 무관하고, 회합에 참여했다고 해도 사제 총을 만들어 맞서자는 발언에 코웃음 치던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그들은 모두 21세기판 보도연맹에 묶이게 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은 ‘광장의 중우(어리석은 대중), 기회주의 지식인 언론인,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영합 정치인’까지도 경계의 대상으로 꼽았습니다. 그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이라하더라도, 그들의 기본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들까지도 포함시키려는 것입니다. 당장 저와 <한겨레> 구성원 모두는 그런 ‘기회주의 언론인’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이른바 아르오 회합에서 일부 참석자는 전쟁 등 비상한 상황에서 주요 국가시설 파괴 등을 언급하며, 예비검속과 학살 테러에 의한 죽임 따위를 언급했다고 했습니다. 예비검속, 학살 따위의 이야기를 듣고는 쓴웃음만 나왔습니다. 이미 해방 이후 국가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가 재평가도 하고, 사죄도 하고, 배상도 하고, 기념물도 곳곳에 세워진 터입니다. 그들의 공포감이 망상이거나 아니면 변명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헌재 결정을 보고, 또 이후 진행되는 행태들을 보며 그런 나의 생각은 바뀌고 있습니다. 이 정권은 이미 그들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기본권을 박탈하고, 이 사회에서 영구히 고립시키고 배제하려 하고 있습니다. 헌재는 그들을 사실상 반국가단체로 낙인찍었습니다. 관변 단체들은 즉각 통합진보당 당원 전체를, 사형까지 가능한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 등으로 고발했습니다.

당원들 다음으로 정리될 사람은 그들이 정리되면 부역자, 혹은 ‘쓸모 있는 바보들’이 될 것입니다. 지식인, 언론인, 우중, 정치인, 진보주의자 등이 그들입니다. 이게 보도연맹사건의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해방공간에서는 친일파에 의해 주로 저질러졌다면, 지금 사태를 주도하는 이들은 온갖 편·불법으로 기득권을 쌓아올리거나 탈취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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