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잡고 정적을 대하는 ‘닮은꼴’ 아버지와 딸
스스로 ‘당신’을 지켜 불행한 역사 되풀이 말아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신임 당 대표가 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 후 작성한 방명록. 공동취재사진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94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새 대표가 어제 현충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모든 역사가 대한민국입니다. 진정한 화해와 통합을 꿈꿉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두 가지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는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였습니다. 적나라한 관권·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후보는 신승합니다. 서울에서 40만표나 뒤진 걸 보면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선거 기간에 김대중 후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선거가 끝나면 박 정권은 총통제를 추진할 것’이라고. 그의 말마따나 1년 뒤 유신체제가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듬해 김대중씨를 납치해 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 합니다. 영구집권의 절대적 걸림돌을 제거하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돌아옵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가 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가운데 문재인 대표의 화환이 묘소 앞에 놓여 있다. 공동취재사진
두번째 장면은 2012년 대통령선거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댓글 공작’이 막판 쟁점으로 떠올랐을 때였습니다. 당신은 12월14일 “성폭행범이나 사용할 수법을 동원해 여직원의 주소를 알아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16일 토론에서 “(민주당은 김씨를) 2박3일 동안 밥도 물도 못 먹게 감금했다”며 이 사건을 20대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문재인 후보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때 그 눈초리를 보면서 등줄기가 서늘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오늘 항소심 재판부는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에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선 후 1년 동안 정권은 문 후보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 총력전을 펼쳤습니다. 국정원의 조직적인 선거공작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습니다만, 당신은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빼내 왜곡 누설하는 방법으로 그를 매장하려 했습니다. 1심 재판부에 의해 터무니없는 짓거리로 판결났지만, 이 정권은 ‘사초 실종’ 운운하며 노무현의 청와대 비서실을 ‘사법처리’하려 했습니다. 아버지나 딸이나 정치적 경쟁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과 1~2년 전의 일이었으니 잊었을 리 없을 겁니다. 그런 문재인 의원이 제1야당 대표가 되어 당신 앞에 섰습니다. 정권이 공격하고 야당 내부에서 조응하며 낙마시키려던 이가 돌아왔으니 답답한 사람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대개의 매체들은 표현은 달리했지만, ‘제2의 대결’, ‘다시 2012’ 따위로 논평했습니다. ‘민주주의와 서민경제를 계속 파탄 낸다면’이란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문 신임 대표가 ‘정부와의 전면전’을 표명한 것은 이런 생각에 더욱 힘을 실었습니다.
사실 그는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두번째로 많은 득표자였습니다. 가장 많은 득표자는 당신이었습니다만, 차이는 100만여표로 근소했습니다. 정보기관 등 정부 조직의 조직적인 개입 속에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정권의 집요한 공격 속에서 살아남아 돌아왔으니, 두번째 전쟁을 예고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사 박정희 묘소에 참배를 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의 맞상대가 아닙니다. 단임제에서 대통령에게 경쟁 상대란 없습니다. 유일하게 있다면 자기 자신뿐입니다. 전지전능의 환상에 사로잡히고 오만에 빠지며, 불통을 권위로 착각하는 자신만이 경쟁자인 것입니다. 물론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는 당신을 끌어들여 맞상대하고자 합니다. 집권 여당의 실질적 오너가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그래야만 자신의 격을 ‘영수’급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단임 대통령의 경쟁자는 아닙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던 원 전 원장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당신은 지금 임기 3년차라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 해로 친다면 봄에 뿌린 씨앗들이 싹틔워 왕성하게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잎채소나 일부 뿌리채소는 수확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경작지는 전답인지 황무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라는 곡식도 없고, 거둘 것도 없습니다. 온갖 잡초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비긴다면 해가 중천으로 올라갈 때이기도 합니다. 가장 환하고 밝고, 뜨거워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게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습니다. 희끄무레한 백야입니다. 정권은 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알 겁니다. 당신은 그동안 할 일은 안 하고 그림자만 쫓아다니며 칼질을 했습니다. 첫해는 문재인 및 선거부정 의혹 그리고 역사의 유령들과 싸우고, 둘째 해는 무능과 잘못을 감추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국민에게 했던 약속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동시에 당신도 사라졌습니다. 대신 숨어 있던 오만·불통·분노의 ‘박근혜’가 전면에 대두했습니다. ‘100% 대한민국’의 기치는 사라지고, 이념·지역·세대·계층으로 대한민국을 분열시키는 일만 했습니다. ‘미래’의 기치도 꺾이고, 역사를 독재와 권위주의의 무덤 속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정치는 학문을 통제하고, 문화를 억누르고, 역사를 뒤집었습니다. 경제민주화는 사라지고, 약탈과 착취와 억압 그리고 갑질이 활개를 칩니다. 공정한 사회?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월급쟁이와 서민 지갑만 탈탈 터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꼴을 당하다 보니 50·60대마저 등을 돌리게 됐고, 이 정부는 낮도 밤도 아닌 ‘백야의 정권’이 되었습니다. 혹자는 과연 당신에게 싸워서 지킬 ‘나’가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원칙과 신뢰라는 대의 아래 국민에게 했던 약속들의 총합이 지켜야 할 당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당신을 지키기 바랍니다. 공연히 헛것과 경쟁하지 말고, 그림자와 칼질하지 마십시오.
문 대표가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소 앞에서 한 묵념을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묵념(말없이 마음에 새기는 생각)의 내용이지, 망자에게 갖춘 예의가 아닙니다. 박정희는 1963년 8월 강원도 철원 5군단 비행장에서 열린 전역식 전역사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쿠데타 후 했던 민정 이양의 약속을 뒤집기 위해 동원된 수사이지만, 그는 자신의 말마따나 불행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유신의 몰락 직후 전두환 등 신군부의 정치군인들이 다시 그의 뒤를 따라 헌정을 유린했습니다. 그는 불행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보다 앞서 아내가 피살되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불행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정권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저 자신이 부하의 총탄에 죽었습니다. 이승만? 제 국민에게 쫓겨난 그는 만리타향에서 떠돌다가 상주 없는 주검이 되어 돌아온 자였습니다.
곽병찬 대기자
정치인 혹은 대통령이 되고 싶은 이들이라면 그들 묘소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저들처럼 불행한 인간, 불행한 정치인, 불행한 대통령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 나라에는 두 사람 말고도 불행한 대통령이 충분히 많습니다.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마십시오. 그러자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무지와 집착, 증오에 사로잡힌 ‘박근혜’를 이겨내야 합니다. 당신의 적은 당신입니다. 문재인이 아닙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