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첫 이주민 국회의원,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이주민 대표하는 짐은 기회만 된다면 기꺼이 질 것이라며 씩씩하게 말하는 서대문 아줌마!
이주민 대표하는 짐은 기회만 된다면 기꺼이 질 것이라며 씩씩하게 말하는 서대문 아줌마!
“논란을 만들어서 미안해요.” 심심한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제1053호 레드 기획 ‘지금, 그녀에게 한 것이 그들이 한 모든 짓이다’는 역시나 숱한 ‘안티 댓글’을 양산했다. 웃으며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이 답했다. “국회에 들어왔을 때 조용히 살아야지 했어요. 제발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아무 말도 시키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뭐든 하면 확대해석을 하시잖아요.” 가만히 있고 싶은 사람을 또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현실에 대해 그와 3시간 대담을 나눴다. 돌아와 책상에 앉아 드는 생각은, ‘와~ 이자스민 정말 씩씩하다.’ 서대문 아줌마, 이자스민의 마지막 말은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을 것이란 생각으로 살아요.” 낙천적인 이자스민 의원… 미안해요, 안티에 ‘떡밥’을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정확한 기사가 나와도 걱정
(논란이 많아서) 재미있겠어요.
(하하하) 재미라도 있었으면…. 보통 생각하는 그 재미가 아닌 것 같아요.
악명도 명성이라고 하잖아요.
이건 너무 악명이라서요.
최근엔 우호적인 기사도 많이 나왔죠.
덕분에 지지하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사가 나와도 걱정돼요. 얼마 전 금요일에 좋은 기사가 떴는데, 저는 한마디만 나오더라고요. ‘야~ 주말이라서 다행이다. 월요일쯤이면 조용하겠구나.’ 끝없이 관심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정상은 아닌 거죠.
기사 댓글을 열심히 본다면서요?
그냥 읽어져요. 2005~2006년 방송 활동을 하면서 버릇이 됐어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알아야 하니까요. 이게 정치인병보다 연예인병이거든요. (웃음) 여의도 방송사에서 길 하나 건너 국회로 왔는데, 반응이 완전히 달라요. ‘도로를 건너지 말았어야 했나’ 하죠. 애들한테는 ‘뉴스 자체를 보지 마’ 그래요.
중학생 딸과 대학생 아들이 있죠.
아들이 남자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집에 오자마자 “엄마, 군가산점 반대했어?” 그래요.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뉴스 보지 말라고 했잖아” 했더니 친구들이 “너네 엄마 반대했단다” 했대요. 모를 수가 없죠.
댓글 전문가가 됐겠어요.
이제는 이 기사에 이 댓글을 쓴 사람이 지난 기사에 어떤 댓글을 달았는지 알겠어요. 반복해서 링크를 걸고 복사를 하거든요. 아이디가 달라도 알죠.
가끔 ‘그분 안 오셨나’ 할 정도?
오히려 자신감을 얻어요. ‘아, 결국은 똑같은 사람들구나, 안 늘어났네’ 하죠. 한편 사람 생각을 바꾸기 참 힘들구나, 깨달음도 얻고요.
반대하는 분들을 직접 만난 적도 있나요?
국제결혼 피해 남성이라고 하시는 분들을 만났어요. 다른 의원실은 안 만나주는데 이상하게 이자스민 의원실만 오라고 한 거죠. 댓글을 읽는 것과 같아요. 만나지 않으면 어떤 생각을 가진 분들인지 모르니까요. 제 생각을 가장 잘 전달할 사람은 저잖아요.
“복지는 돌려막기가 아닙니다”
항의 전화도 많이 온다고요?
좀 웃긴 게, 정청래 의원이 대표발의한 ‘아동복지법 일부 개정안’을 제가 만든 것처럼 오해받았잖아요. 이주아동 관련 때문에요. 당시 어마어마한 항의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내고는 단단히 각오했죠. 근데 막상 9통이 왔대요. 한번 ‘이자스민 아니라네?’ 한 효과죠.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이 미등록 아동에게 특별체류, 복지 혜택을 줘서 “우리 아이들이 더 살기 힘들어진다”고 걱정하는 인터넷 글이 많아요.
복지는 돌려막기가 아닙니다. 다른 것을 가져와 쓰는 게 아니죠.
어휴, 무슨 말이에요. 세금 낸 만큼 받아야죠. (웃음)
사실 특별체류를 빼고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복지예요. 근데 법안 하나로 모아서 잘 보이니까 반대가 심한 거죠. 특별체류 자격을 무작정 주자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령으로 정하자는 거예요. 법안이 구체화되면 반발이 적어지겠죠.
유명한 줄 알았는데 국회에 와보니 의원 일부도 그를 몰랐다.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첫 번째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주민을 처음 만나느냐가 이주민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크게 끼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댓글에 보이지 않는 중립적인 다수의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처음 만나는 이주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국회의원 이자스민이 느끼는 책임감이다.
두세 번째 이자스민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모임에 갔는데 어떤 이주여성이 질문을 해요. “당신에 대한 기사와 댓글을 다 읽었는데, 어떻게 견디냐?” 그게 정말 무서운 거예요. 위축되면 기회를 줘도 못하게 되니까. 저를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되기 바랐는데 거꾸로 되잖아요.
주변 사람들이 더 무서워하는군요.
‘나는 죽어도 한강에 뛰어내리지 않을 것이다’, 저는 이걸 보여주기 위한 거거든요. 사람들이 그걸 봤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런데 오히려 위축시키는 위치가 될까봐 두렵죠. (이주민이) 한국 사회와 많이 부딪혀야 정도 생기고 미움도 생기고 그렇잖아요.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보면 맞짱 뜨자고 하는 것 같아요.
첫 경험이 중요해요. 제가 이주를 했을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이 너무 좋았어요. 시할머니·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정말 가족적인 분위기였어요. 지금도 시아버지 칠남매가 매달 만나요. 부정적 댓글을 달고 나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제가 대한민국에서 만난 그 수많은 좋은 사람들을 이기지 못해요. 그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진 못해요. 저는 좋은 것을 많이 받아서 그걸 돌려주고 싶어요.
한국과 필리핀의 여성에 대한 태도나 문화가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제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여성성이 부각되진 않아요. 지금 이주민 정책이 예전보다 자리를 잡았지만, 인식은 예전이 나아요. 제가 1996년에 왔는데 당시는 외국인을 보면 ‘네가 뭘 뺏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했어요. 어린 나이에 외국에 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얼마나 고생이 많냐고 그랬죠. 제가 그런 틀에서 컸거든요. 자랐거든요. 챙기고 보살피는 문화의 혜택을 아주 많이 봤어요.
‘컸다’ ‘자랐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특혜는 국회의원이 돼서가 아니라 그때 받으셨군요.
그렇죠. 식당에 가면, ‘야 매운 거 못 먹지, 니네 나라 이거 있니’ 하면서 없는 반찬도 주고.
가족 얘기를 더 하자면, 아들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거 아셨어요?
그럼요. 전에는 고깃집 불판을 닦았어요.
아들이 일하던 편의점에서 담배가 분실돼 논란이 있었죠. 국회의원이 아들한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켰다는 게 더 놀랍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저 때문에 우리 애들이 다른 애들처럼 살지 못하는 건 굉장히 싫거든요. 아들이 18살이 돼서 “이제 휴대폰 비용은 내가 낼게” 했어요. 지금도 자기가 내고요. 웃으면서 “아이고, 네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했죠. 근데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너는 숨만 쉬어” 그래요. 너무 미안하죠.
교육철학이 확고하네요.
국회의원 됐다고 안 시키는 게 이상하죠. 부모가 국희의원이지 애가 국회의원이 됐나요.
불의의 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지 2년이 지나 그는 의원이 됐다. 2008년 ‘이주여성 지방의원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음에 생긴 일이다. 2010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 영입 제안을 거절했지만, 2012년 다시 국회의원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다.
두번 거절하고 받아들였어요.
2012년은 굉장히 다릅니다. 남편이 없어요.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거든요. 프로젝트를 진행한 단체에서도 ‘정치에 들어가서 갈기갈기 찢어져 나오는 사람 많다. 남편 없이 할 수 있겠느냐’ 걱정했죠. 시부모님과 상의 끝에 하기로 했어요.
양다리 국회의원의 메리트
본인이 수락한 이유는 뭔가요?
한국에서 17년을 살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에도 익숙하고, 말도 그 정도면 잘하는 거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리니까 잘해보자 생각했어요.
새누리당이 150만 명 이주민 중 왜 이자스민을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당시 국면 전환을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미 알고 있는 인재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사실 ‘저를 왜 뽑으셨어요?’ 물어보기 힘들죠. 나중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얘기해서 됐다’ 그래요. 확인할 길이 없으니 ‘감사합니다’ 그러고 말죠.
(웃음) 스펙이 좋잖아요.
한국에선 이민을 허용하는 범위가 가족이 되는 거니까, 다문화가정의 이주여성이 아닌 사람을 넣을까요? 약자인 여성이고 약자인 이주민이고 약자의 세트를 모두 가지고 있죠. 게다가 남편을 잃었지만 시댁과 같이 살죠. 예전에 강의를 많이 다녔어요. 청와대에서 점심시간에 강사를 초청해서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는데 거기도 갔었죠. 많은 정부부처에서 자문위원도 했고요. 물방울나눔회로 어려운 사람도 도왔고요.
공짜 점심은 아니었군요. 당시 민주당에서 영입 제안을 했으면 어땠을까요?
사람들이 늘 그렇게 물어봐요. 그런데 민주당 의원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국회 안에 들어와서 보니, 가령 발의하는 법안 같은 경우에는 여야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저만의 메리트도 있죠. 여당 의원들은 당연히 제 편을 들어주지만, 소수자 이슈 같은 경우에는 야당 이슈이다보니 야당 의원들도 모른 척하지 않으시죠. 제 법안의 공동발의자에는 여야 의원들이 함께 있어요.
양다리네요. 아니 국회 특별체류 자격이군요.
(웃음) 그러네요.
이주민 정치인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요?
이주민 1세대는 편견과 차별을 어느 정도 감내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에요. 어른이 돼서 새로운 나라에 왔으니 조금은 참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런데 2세들은 다릅니다. 내가 여기서 태어났는데, 엄마가 외국인일 뿐인데, 왜 다르게 보느냐? 이게 큰 문제가 될 거예요. 2세들을 위한 희망을 만들고 싶어요.
“필리핀에서 성장하고 한국에 왔잖아요. 정치가 어떻게 달라요?” 우문에 현답이 나왔다. “성장은 한국에서 했어요. 생각해보세요. 필리핀에서 18년을 살았다고 거기서 모든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게 웃긴 거예요. 사회생활은 시작부터 한국에서 했어요.” 이렇게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진실이 있다. 그래서 곤란한 질문이 있다. “사람들이 ‘이런 때는 필리핀에서 어떻게 해요?’ 하고 물어요. 근데 저도 몰라요. 못 살아봐서.” 그는 투표도 한국에서 처음 했다.
낯선 만남으로 사람도 사회도 성장해야
지금까지 누구 찍으셨어요?
여자 나이와 투표는 물어보지 않는 거예요.
결혼이주 여성으로 네 번의 정부를 겪었어요. 어떻게 다른가요?
비교할 근거가 없어요. ‘다문화’라는 단어가 2003년에 나왔지만, 다문화가정지원법이 만들어진 것은 2008년이에요.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결혼을 했는데 주민등록등본에 이름이 안 나와요. 아직 귀화를 하지 않아서 주민등록이 없대요. 어이가 없어서, ‘내가 귀신이야?’ 했어요.
이주의 밀물이 오는데,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어때요?
저 같은 사람이 나왔단 것이 변화죠.
국회에 ‘이자스민 효과’가 있나요?
의원들이 그래요. 우리가 선진국 수준의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반응을 보니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요. 사석에서는 ‘이민법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의원이 많아요. 특히 농촌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이 그렇죠. 사회에서 반대 목소리가 커질수록 국회에서는 ‘이걸 어떻게 자리잡게 할까’ 고민이 커지고 있어요.
이자스민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어요.
깃발을 꽂는 것처럼 제가 지표가 된 거예요.
이주정책에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국무총리실에 외국인정책위원회, 외국인노동자정책위원회, 다문화가정정책위원회, 3개가 있어요. 예컨대 이주여성이 결혼해서 오면 다문화가정정책위원회 활동 대상이 됩니다. 귀화 전에는 외국인정책위원회, 일을 하면 외국인노동자정책위원회에 관련되죠. 임기가 끝나기 전에 다문화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데 애쓰고 싶어요.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이라고 시작해서, 어찌 보면 150만명 이주민은 같이 살아도 헌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헌법을 ‘모든 사람은’이라고 바꾸자는 제안이 있지만, 헌법을 바꾸기 전에는 이민법, 이민국을 만들지 못하죠.
다문화 정책도 정책이지만 실행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단 얘기도 많이 했어요.
다문화가정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를 통합했어요. 자꾸 만나야 해서요. 근데 문제가 생기죠. 예컨대 꽃꽂이 수업을 하는데 초·중·고급으로 나누잖아요. 공무원들이 “초급반에서 이주여성들이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같이 못한다” 그래요. 그래서 “초초급을 만드세요” 했어요. 다문화가정 어머니들이 초초급반에서 언어를 익힌 다음 초급에 가면 되죠. 그러면 “아, 네” 해요.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거죠. 이렇게 낯선 만남을 통해서 사람도 성장하고 사회도 성장해요.
“저… 영어는 없어요?” 다문화가정 엄마에게 무료로 엄마 나라 말을 가르치니 아이를 보내라고 하면 엄마는 그렇게 묻는단다. 그녀가 베트남에서 왔든, 필리핀에서 왔든, 그녀는 영어공화국 대한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문화 정책은 어렵다. 예산을 배정하고 인력을 배치한다고 끝이 아니다. 정책의 대상을 추상적 존재로 규정하지만 당사자는 구체적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주민 당사자의 경험이 소중하다.
가정폭력으로 희생된 이주여성 추모제에 해마다 참석하고 있어요.
제가 안 가면 (국회의원 중에) 누가 가겠습니까? 그건 이주민 대표로서 의무라고 생각해요.
아까 “제가 살아왔고 사는 곳은 서대문이라고요!” 한 말이 기억에 남아요. 서대문 아줌마 이자스민의 서대문 지역구 출마는 가능한가요?
글쎄요. 기회가 오면 마다하지 않죠. 아직 상징적인 이주민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 대표성을 누군가 가져야 한다면 짊어져야죠. 이왕 욕먹은 거 더 먹으면 배부르죠, 뭐.
한국에서 이주민 정치가 가능할까요?
그게 고민이죠. 우리나라가 준비돼 있을까. 이주민이 한 지역에 집중해 사는 것도 아니고. 많은 얘기를 듣죠. 누구는 ‘안산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안산은 이주노동자가 많은데 그분들한테 투표권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안산 이주노동자 밀집 지역이 슬럼화된다는 반감도 크고요. 당이 저를 그곳으로 보내도 ‘외국인 동네로 만들려고 하냐’는 소리를 들을 거예요.
“이자스민이 못하면 누가 하겠어?”
인상에 남는 정치인이 있나요?
북한이탈주민 출신인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과 가끔 저녁을 먹고 맥주도 마셔요. 다른 의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고충을 함께 나누죠.
힘들 때 어떻게 위로를 받아요?
남편이 항상 했던 말을 기억해요. “이자스민이 못하면 누가 하겠어?” 언젠가 굉장히 비난받고 있을 때였는데, 집에 도착하자 아들의 첫 마디가 “엄마, 나 신문 안 봐” 그래요. 위로하려고 애쓰는 거잖아요.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지난 4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만난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은 3시간여 인터뷰 내내 씩씩하게 답했다. 그는 “이주가 준 결과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당당함”이라고 말했다. 정용일 기자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은 비례대표가 되기 전에 물방울나눔회 등 시민단체 활동을 했다. 이자스민 의원실 제공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은 보좌진과 함께 이주, 여성, 아동에 관련된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다. 정용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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