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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생뚱맞은’ 실용주의 진짜 속셈은?

등록 2005-01-28 16:03수정 2005-01-28 16:03

김진표 교육부총리. 황석주 기자
김진표 교육부총리. 황석주 기자
[분석] ‘개혁없는 실용론’은 누구에게 추파를 던지는가

교육정책의 ‘실용주의’적 접근이 마침내 세제전문가 교육부총리를 낳았다.

실용주의는 여러 흠결이 드러나 대학총장에서 중도하차했던 인사를 교육부총리로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공직자윤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가치로 활용된 바 있다. 또 그 인사에 책임이 큰 대통령 비서실장의 유임을 가능하게 하는 버팀목 구실을 하기도 했다. 한 달 전만 해도 4대 개혁입법을 놓고 운명을 건 대결을 벌이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무정쟁’과 ‘상생’을 노래할 수 있게 한 합창곡의 표제어도 다름아닌 ‘실용주의’다. 가히 실용주의 천하다.

조선일보, 한나라당도 ‘실용인사 김진표’ 맹공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원단 실용주의자를 자임해온 쪽으로부터도 ‘생뚱맞다’는 반응을 부르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이후 줄곧 실용주의노선 채택을 압박해온 <조선일보>는 김진표 교육부총리 임명을 놓고 28일치 사설 ‘교육부총리 맡을 사람이 그렇게 없는가’에서 “대학 개혁이 절실한 게 사실이지만 반드시 경제전문가 중에서 교육부총리를 뽑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며 “세금과 교육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분야”라고 타박했다.

2003년 5월 미국을 방문해 “미국이 없었다면 난 지금도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 노 대통령의 태도를 여당조차 마뜩찮아 할 때 “실용주의 대미외교”라며 쌍수를 들어 반겼던 한나라당도 이번만큼은 예외다. 전여옥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교육부총리가 실패한 경제부총리로 정해졌다는 것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판”이라며 “교육이야 말로 눈앞의 이윤을 생각하는 냉정한 비즈니스가 아니라 100년을 내다보는 원대한 꿈이 있어야 한다”고 거세게 혹평했다.


다만 <중앙일보>만이 사설에서 “현재와 같이 대학은 넘쳐나지만 정작 쓸 만한 졸업자는 부족하고, 대학 교육과정이 산업계 요구와는 동떨어지게 운영되고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김씨와 같은 경력자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며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쟁원리에 따라 대학을 혁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볼 만하다”고 밝혔다. 이 신문의 걱정은 김 부총리의 경력이나 철학이 아니라 “갈등과 반발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데 닿아 있을 뿐이다.

▲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5월 미국을 방문해 “미국이 없었다면 난 지금도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출범초기부터 실용주의 외교론을 폈다. 미국 방문을 보도한 문화방송 뉴스 장면. \


우리 사회에서 나름대로 개혁적 목소리를 내온 세력들은 김진표 교육부총리 임명에 하나같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의 반발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맞닥뜨린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반발은 뜻밖이다. 또, 실용주의 이름 아래 정치적 이해를 공유해온 것으로 보이는 중앙일보가 조선일보나 한나라당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도 낯설다. 세제전문가 교육부총리 임명이라는 파격적 상황에서 이처럼 복잡한 반응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박석무 “다산의 실용은 현실 개혁의 방법론”
“철학 없는 실용주의 주창은 자기 혼란에 빠질 것”

실용주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조선시대 대표적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성균관대 석좌교수)은 “실용주의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는데 정작 그 말의 본뜻이 무엇이고 그게 실현되려면 어떤 기초적 작업이 선행돼야 하는지 전혀 논의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산은 그토록 실용과 실학을 강조하고 실사구시의 세상이 도래하기를 염원했지만, 동시에 ‘철학이 빈곤하고서는 실용이니 실학, 실사구시의 높은 가치는 절대로 실현되지 못한다’고 설파했다”고 강조했다. 철학이 뒷받침되지 못한 공허한 실용주의 담론으로는 실용주의를 주창하는 이들 스스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철학의 공백을 대신 메운 건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다. 여기서 실용주의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공적 정당성을 포장하는 장치일 뿐이다. 최근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은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에 모든 것을 집중하겠다고 한 이야기는 방향을 잘 잡은 것”이라며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마음껏 경제적으로 총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겠다. 4대 입법문제는 유보하고 1년 동안은 정말 무정쟁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실용주의는 4대 개혁입법 중단과 관련돼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조선일보와 한나라당 모두 실용주의를 외치고 있지만, 비난의 화살은 한쪽으로만 쏠린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안팎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열린우리당 신임 지도부의 취임 일성인 “출자총액제한제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정세균 원내대표)와 “보안법 폐지에 무리하지 않겠다”(원혜영 정책위의장)는 발언은 열린우리당 의원들로부터 “실용주의를 내세우면서 정치개혁 입법이 후퇴하고 있다”거나 “출자총액제한제를 완화하는 것은 한나라당의 정략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반발을 부르고 있다. 노 대통령의 최근 인사행태는 말할 것이 없다.

“노 정권의 급진 이미지는 노선이 아니라 스타일 때문”

비난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쪽으로만 집중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실용노선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노 대통령 노선은 “출범부터 실용주의”라며 집권 3기에 접어들어 또 다시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생뚱맞다’는 분위기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인사정책, 경제정책, 외교정책 등 노무현 정부는 시민단체나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수준 이상으로 실용주의적이었다”며 “다시 실용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 새삼스럽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그럼에도 지난 연말 4대입법 실패와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하는 것이 지나치게 강경개혁 노선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인데 이것은 잘못 진단한 것”이라며 “노 정권이 레디컬하게(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은 노선과 이념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논쟁적인 스타일로 정치적 대립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손 교수는 또 “정치권이 말하는 실용주의는 이른바 온건파의 다른 이름인데, 문제는 열린우리당 온건파는 확실히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아가지만 한나라당은 여전히 강경파가 힘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런 비대칭적 구조 속에서 열린우리당의 실용주의 노선은 우경화에 다름아니다”고 분석했다.

‘실용은 없고 정치적 계산만 있다’
“실용주의로 지지기반 확대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것이 정작 실용주의”

여권의 실용주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시기가 정치적 일정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손호철 교수는 “새해 들어 선거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열린우리당이 경제되살리기 등 실용주의를 내세우며 중간층 끌어들이기에 나선 것”이라고 풀이했다. 오는 4월이면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유지 여부를 가릴 재·보궐 선거가 실시된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개혁을 내걸고 권력을 잡은 뒤에 개혁은 하지 않고 권력재창출을 위해 개혁 대신 보수세력에 투항하는 형국”이라고 거세게 비난했다. 실용주의에 실용은 없고 정치적 계산만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권의 정치적 계산이 그나마 맞아떨어질지는 의문이다. “실용주의를 내세운다고 지지기반이 확대되지는 않는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던 세력들도 이제는 민주노동당이라는 대안세력을 갖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쪽은 웬만큼 우경화해도 끌어들일 수 없다.”(손호철 교수)

“개혁을 표방하던 정권들이 선거 때면 재벌기업과 힘있는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새로운 변화를 절감하는 젊은층과 서민들에겐 더 큰 실망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 교수)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실용주의를 내세워 국가보안법 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반면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지난해 한 인터넷 매체에 올린 글에서 “국가보안법은 인권 차원에서 폐지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야당이 목숨 걸고 반대한다면 내용상으로는 폐지와 마찬가지인 대체입법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점에서 나는 실용적이다”고 밝혔다. 상징 대신 본질을 취하는 게 실용주의라는 태도다. 홍성태 교수는 “국가보안법이 인권과 통일의 걸림돌이 되고 수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면 그 원인인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게 정작 실용주의”라고 말했다.

“경제 실용론은 대기업에 굴복을 포장하려는 장치”
“아랫목은 펄펄 끓는데 웟목은 냉골, 양극화만 부추겨”

정치권의 실용주의론에는 경제살리기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여권이 실용주의를 내세운 건 어려운 경제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실용주의는 민생경제의 다른 말처럼 쓰인다. 정세균 당의장은 ‘성공하는 개혁’을 강조하며 “먼 곳의 물로는 눈 앞의 갈증을 풀지 못한다는 ‘고어지사(枯魚之肆)’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자”고 했다. 한마디로 먹고사는 문제를 풀지못하면 개혁은 좌초할 것이란 불안감이다.



그런데 여권의 민생경제 해법은 출자총액제한제의 완화, 기업의 과거분식회계에 대한 집단소송제도 유예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필상 교수는 “출자총액제한 완화에서 나타나듯 정부가 대기업 요구에 굴복하면서 그것을 경제살리기라는 실용주의로 포장하고 있다”며 “경제 실용론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과 강력한 경기부양책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 교수는 “하지만 이런 처방으로는 경제위기의 원인인 양극화가 오히려 심화돼 중소기업, 자영업, 서민들은 더 어려워 질 것”이라며 “구조조정 대신 일자리를 늘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에게 균등한 기회를 줘 상생할 수 있는 법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미래산업과 첨단산업, 문화산업 등 새로운 경제의 성장동력을 찾는 게 진짜 실용주의 경제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최고의 국회의원으로 뽑힌 바 있는 민주노동당의 심상정 의원도 실용 경제론을 이른바 ‘윗목아랫목론’(대기업이 잘 돼야 중소기업과 서민은 물론 국민경제에 떡고물이 떨어진다는 논리)에 빗대 비판했다. 심 의원은 한 시사프로에서 “아랫목을 아무리 덥혀도 윗목이 따뜻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무언가 한국 경제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근본적인 구조개혁, 즉 보일러 교체가 필요하며 동시에 보일러 교체가 끝날 때까지 얼어죽지 않도록 윗목에 있는 사람들에게 담요라도 갖다 줄 수 있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의 필독서가 다산의 <목민심서>였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그러나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의 실용주의는 개혁사상인데 도대체 다산의 실용주의를 제대로 알고 떠드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박 이사장은 “실용주의 노선으로 가려면 문제의 근본원인을 밝혀낸 다음 이를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며 “요즘 정치인들은 실용주의를 한다면서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수단으로 쓰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박종찬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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