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7~8일 연이틀에 걸쳐 여당 지도부 만남과 국무회의 등을 통해 국회 계류중인 법안 처리를 촉구하며 야당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확신에 찬 어조로 강한 주장을 쏟아냈습니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각 법안의 내용과 사실관계, 논쟁점, 야당 입장 등을 따져봤습니다.
1. 노동개혁 5대 법안
-(박근혜 대통령)“아들 딸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부모 세대한테는 안정된 정년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다. 경제활성화·노동개혁 법안들을 통과시키면 어느새 경제가 살아나는 것 아니겠는가”(7일 여당 지도부 만남)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노동개혁 5대 법안 가운데 기간제법과 파견법은 비정규직 양산법으로,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 국회의원 하는 동안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안을 만들어낸다면,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일”(8일 관훈클럽 토론회)
=> ‘기간제법’은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법입니다. 비정규직일지언정 좀더 근무할 수 있다고 할 순 있겠으나, 전반적으로 비정규직이 더 늘어나고 ‘4년 뒤’에 대한 뚜렷한 보장은 없습니다. 새누리당이 기간제법을 ‘비정규직 고용안정법’이라고 부른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법은 ‘비정규직’을 위한 법입니다. 이 법이 실시되면, 기업들이 숙련된 비정규직을 좀더 오래 쓸 수 있어 인건비 감소를 실현할 수 있겠지만, 전체 근로소득자들의 평균 임금은 지금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커, ‘어느새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예측은 스스로도 자신있게 말한 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 ‘파견법’은 현재 파견업종 제한으로 묶여있는 ‘6개 뿌리산업’ 등 일부 업종에 대해서도 파견근로자를 쓸 수 있도록 하자는 법입니다. 새누리당이 파견법을 ‘중장년 일자리법’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대상이 ‘55살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이 ‘부모 세대 안정된 정년 보장법’이라고 한 것은 이 파견법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 파견근로자로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는 말씀으로 추정됩니다.
=> 그런데 ‘아들 딸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라는 대통령 말씀은 어떤 법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기간제법’은 ‘35살 이상’ 비정규직 근로자에게만 적용되고, ‘파견법’은 ‘55세 이상’, 더욱이 ‘6개 뿌리산업’은 주조, 금형, 용접, 소성가공, 표면처리, 열처리 등인데 대졸자들이 55세가 될 때까지 용접·금형을 배워 그때 취업하라는 말씀은 아닌 듯 합니다만…
2.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
-(박 대통령)“법이 통과되면 70만개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청년들이 학수고대하며 법 통과만을 기다리는데”(7일),
“(야당이) 집권하던 시절에 적극 추진하던 정책을 이제 와서 반대한다면 누가 그 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도 신년 연설에서 일자리를 위해선 의료서비스 분야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8일 국무회의)
-(문 대표)“‘70만개’라는 수치는 우리나라 서비스산업이 미국처럼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연구결과에 따른 것이다. 2013년 외국인투자촉진법이 통과되면 즉시 1만3천개의 일자리가 생기는데 야당이 발목잡아 안해준다고 대통령이 여러번 불평했다. 결국 통과됐지만 일자리는 고작 100여개 생겼다”(8일)
=> 이 법은 서비스산업 R&D에 대해 자금지원과 세제 혜택을 주는 법입니다. 정부는 법이 통과되면, ‘2030년까지 최대 69만개’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서비스산업이 활성화돼 전국에 병원, 호텔 등이 00개 더 들어서면 여기에 일자리가 00만개 생겨난다’는 식이어서 법안을 살필 때 그냥 참고할 사항이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안은 아닙니다.
또 야당은 이 법이 통과되면, 서비스업에 포함된 보건·의료 분야의 민영화가 추진돼 공공의료 기반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보건의료 분야’를 제외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특정 분야를 송두리째 들어내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며 야당의 제안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의료서비스 분야가 중요하다’고 했지 않느냐는 박 대통령의 지적은 사실입니다. 당시(2006년 1월18일) 노 전 대통령은 신년연설에서 “대학교육과 의료서비스는 고급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산업적 측면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일자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개방하고 서로 경쟁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질 높은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전략적 산업으로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대학교육과 의료서비스를 산업으로 발전시켜서 국민들이 해외에 나가서 돈을 쓰게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만 그렇게 하더라도 정부는 국민에 대한 보편적인 서비스, 공공서비스는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현재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의료서비스 개방과 전반적인 방향성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료민영화와 관련된 법은 사실 참여정부에서 그 근간이 마련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노무현 정부의 의료서비스 전략이 해외환자 유치, 외국병원 도입 등 ‘의료개방’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박근혜 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원격의료, 병원 부대사업 등 ‘국내병원 영리사업’ 쪽에 좀더 무게중심을 두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3. 테러방지법
-(박 대통령)“대한민국이 테러방지법조차도 없는 게 세계에 알려지면 얼마나 테러를 감행하기 만만한 나라가 되겠는가, 기본적인 법이 없으니 외국과 국제공조도 못하는 기막힌 사정, 우리나라는 (IS가 지목한) 테러대상국”(7일)
-“우리나라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기본적인 법 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 IS(이슬람국가)도 알아버렸다”“앞으로 테러로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됐을 때 그 책임이 국회에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린다”(8일)
=> 논리의 비약이 다소 심한 듯 보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형법이 있는데 왜 살인 사건이 생기는지, 민법이 있는데 왜 사기 사건이 생기는지….
테러방지 관련 법안은 모두 4개인데, 현재 걸림돌은 ‘야당’이 아니라, ‘국정원’입니다. 사이버테러 방지 법안을 보면, 국정원이 사이버테러 방지 활동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로 자리매김됩니다. 해킹·바이러스 유포 등 정보통신망 침해행위, 정보의 훼손·왜곡전파 등을 ‘사이버테러’로 정의하고, 국정원이 사이버안전센터를 설치해 민·관 구분없이 사이버 보안사고에 대한 조사권한과 선제적 예방 명목으로 사이버 위협정보의 수집·분석 권한을 갖도록 돼있습니다. 법원의 영장발부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앞으로 국정원이 ‘테러 방지 목적’이라고 하면, 통신회사들은 일반인의 무선통신 내용을 당사자에게 통보하지 않고 정보기관에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게 됩니다.
이런 문제점을 들어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일반테러 대응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사이버테러 대응은 미래창조과학부가 중심이 되는 게 맞다”며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2001년 김대중 정부가 제출한 테러방지법안의 경우,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정보위를 통과했지만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국정원이 다른 기관을 사찰하고 음성적으로 탄압했던 과거의 허물이 있다”며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반대했습니다.
외국의 경우, 대테러 대응기구가 CIA 등 정보기관이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외국 정보기관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의회의 감시와 보고 의무가 훨씬 강하며, 과거 정권보위를 위해 국민들을 박해하고 인권을 침해한 사례가 거의 없으며, 무엇보다 ‘댓글’을 달진 않았습니다.
4.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
-(박 대통령)“공청회를 거치고 여론을 수렴해가며 (대기업 혜택 관련) 사전방지 장치를 갖췄다”(7일)
=> 철강·조선 등 과잉공급 업종 기업의 경우, 금융이나 세제 혜택을 주는 법입니다. 또 구조조정을 할 때 일정 기준만 충족되면 주주총회 없이 이사회 결정만으로도 사업 개편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법의 도입에 대해선 야권 안에서도 찬반 양론이 있습니다.
야당은 대기업 경영권 승계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에 여당은 ‘특수관계인의 지배구조 강화나 경영권 승계 등 악용 소지가 있는 사업재편 계획은 승인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반박합니다. 박 대통령이 말씀하신 ‘사전방지 장치’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야당은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기업(기업집단)은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현재 구조조정이 필요한 업종 대부분이 조선·철강·석유화학·자동차 등 대부분 대기업 위주여서 야당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정부로선 사실상 ‘원샷법’의 유명무실화에 해당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야당은 원샷법이 대기업에 특혜를 주는 법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완법으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법’, ‘사회적 경제 기본법’ 등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여당은 이에 생산성 저하와 통상마찰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법안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것은 야당 뿐 아니라, 여당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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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7일 여당 지도부와의 만남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뭘 했냐, 도대체’ 이렇게 국민이 바라보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국민들이 “뭘 했냐, 도대체”라는 말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요?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가 8일 박 대통령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위주의 시절 대한뉴스의 한 장면을 보는듯 했다”
“(박 대통령이) 본인 말고는 아무도 민생과 경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정치권을 싸잡아 매도했고,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맞장구 쳐가며 야당을 성토했다. 급기야 우리나라가 테러를 감행하기 만만한 나라가 됐다며, 국민을 위협했다. 법안이 없어 국민을 못 지키겠다는 말을 국군 통수권자에게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대통령이 논란법안의 통과를 위한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자,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국민을 협박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은 특정 법안의 장기간 국회계류를 해당 법안의 정당성의 근거로, 또 정치권이 일을 안 하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지만 경제활성화법 30개 중 25개가 이미 통과됐다. 아직도 통과가 안 된 법안은 노동 5법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거나, 테러방지법처럼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원샷법처럼 제대로 된 논의도 없었던 법안뿐이다. 끈기 있게 이해를 조정하고, 독소조항을 제거하고, 시간을 갖고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민주사회 정치지도자의 의무이자 도리”라며 “이견과 갈등 조정에는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내놓으라 할 일이 아니다. 어떻게 대통령만 옳은가”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8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야당 지도부와도 만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야당 지도부와 자주 만나서 소통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만날 계획이 없다’는 말을 에둘러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야당 지도부와 만난 것은 모두 4차례이고, 이중 여당을 제외한 야당 지도부와 만난 것은 취임 직후인 2013년 4월 문희상 비대위원장과의 만찬이 지난 3년을통틀어 유일합니다. 역사를 들춰가면 일일이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과거 어느 정부보다”라는 말은 ‘다소’(?) 과장된 듯 합니다.
박 대통령은 법안 처리가 안 되면, 대국민 담화나 대국민 성명 발표를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은 받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권태호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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