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4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 법안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하던 중 물을 마시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1992년 안기부 고문 탓 감옥서 장기 일부 잘라내
아픈 듯 허리 굽히고 다리 짚으면서도 연설 이어가
첫 주자 김광진 의원도 자정 넘기며 잔기침 부쩍
2번타자 국민의당 문병호 의원 “국정원 무섭지 않다”
아픈 듯 허리 굽히고 다리 짚으면서도 연설 이어가
첫 주자 김광진 의원도 자정 넘기며 잔기침 부쩍
2번타자 국민의당 문병호 의원 “국정원 무섭지 않다”
테러방지법안 국회 본회의 표결을 지연시키기 위한 야당 의원들의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필리버스터)가 23일 오후 12시48분까지 12시간18분 동안 진행됐다. 더민주, 국민의당, 정의당이 필리버스터에 참여하거나 신청한 상태여서 ‘필리버스터 야권연대’가 이뤄지고 있다.
국회 의사과는 47년만의 필리버스터에 난감해 하고 있다. 일단 유권해석에 따르면, 필리버스터 도중 동료의원이 추가 자료를 건네는 것은 가능하다. 체력만 있다면 ‘자료 보급투쟁’이 가능한 셈이다. 반면 물을 제외한 음식물 반입은 안 된다. 화장실은 애매한 영역이다. 의사과 관계자는 “과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필리버스터때도 화장실에 간 사례가 없다. 전례가 없어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단상을 비울 경우 필리버스터가 끝나는 것인지 여부 등은 국회의장이 결정할 사안으로 보인다”고 했다.
전날 저녁 7시5분께 첫 발언자로 나선 김광진 의원은 발언이 길어지면서 잔기침을 자주 했다. 정의화 국회의장과 교대한 같은 당 소속 이석현 부의장이 “힘들면 그만 해도 된다”고 했지만 “괜찮다. 계속하겠다”며 발언을 이어갔다. 김 의원의 보좌관은 “의원이 저녁을 먹지 않은 채 자료 몇 개만 들고 단상에 올라갔다”고 전했다.
자정을 넘긴 23일 0시26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64년 본회의 필리버스터 기록(5시간18분)을 넘어섰다. 김 의원은 0시40분 5시간34분간의 발언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섰다. 졸음을 참지 못하거나 휴대전화를 보면서도 후배 의원의 발언을 경청하던 야당 의원들은 박수와 환호로 격려했다. 동료 의원들은 김 의원을 데리고 본회의장을 나갔고, 김 의원은 바나나 한 개를 먹었다. 휴식을 취하는 듯 이날 오전 내내 김 의원의 휴대전화는 꺼진 상태다.
김 의원에 이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국민의당으로 간 문병호 의원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문 의원은 2013년 국회 국가정보원개혁특위 야당 간사로 활동하며, 탈당 전까지는 국회 정보위원으로 새누리당과 테러방지법안 협상 실무를 맡았다.
23일 0시40분 단상에 선 문 의원은 새벽 2시29분까지 비교적 짧은 1시간49분간 발언을 이어갔다. 문 의원은 “테러정보의 집행은 행정부 소관으로 국정원 담당이 아니다. 집행권과 정보권을 엄격히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차별점을 부각시키는 발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새누리당은 국정원을 옹호만 하고 더민주는 무조건 반대만 한다. 내용을 보면 얼마든지 여야가 수정하고 합의할 수 있다. 직권상정에 이르게 된 것은 거대 여야 양당이 싸움만 하는 게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문 의원은 지난달 “더민주는 국정원이 하는 일은 전부 반대한다. 국민의당은 시시비비를 따져 내용을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한 뒤의 입법에 동의한다”, “더민주는 국정원을 대단히 무서워하지만 국민의당 문병호는 국정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새벽 2시30분 은수미 더민주 의원이 3번째 필리버스터 연사로 나섰다. 애초 첫 번째 연사였던 김광진 의원에게 “오전 9시까지 하겠다”고 했던 은 의원은 오후 12시48분까지 발언을 이어가 1969년 박한상 의원의 3선 개헌 반대토론 시간인 10시간14분을 넘어섰다. 당시 박 의원의 발언은 본회의가 아닌 법제사법위원회 발언이었다. 서서 하는 것과 앉아서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마른 체형인 은 의원의 몸은 보통사람과 다르다. 1990년대 사회주의적 제도로의 사회변혁을 꿈꿨던 사노맹에서 정책실장 및 중앙위원을 맡았던 은 의원은, 1992년 검거된 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소장과 대장 50㎝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또 결핵이 후두로 번져 한동안 말을 못했다.
은 의원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필리버스터 발언자료를 들고왔다. ‘내가 이 단상에 있는 한 체포를 못한다’는 제목이었다. 은 의원은 “1973년 필리버스터가 폐지되던 박정희 시절을 암흑시기라 부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다시 필리버스터가 폐지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은 의원실은 “A4 300쪽 분량의 자료를 들고 갔다. 주로 국정원 과거사 문제, 노동인권을 비롯한 인권탄압 문제를 거론할 것”이라고 했다. 은 의원은 중간중간 스마트폰에 올라오는 에스에에스 내용을 발언 자료로 인용했다. ‘테러방지법이 원하는 건 국민에 대한 테러가 아닐까요?’ 등 수백개의 의견을 일일이 소개했다. 이어 지난해 국정원 불법 해킹 의혹 사건과 관련해 캐나다 해킹연구팀의 연구조사보고서, 국정원 대선 개입사건 자료, 2001년 테러방지법안에 반대의견을 낸 국가인권위원회 의견문, 프란치스코 교황의 테러 관련 연설까지 읽어내려갔다.
새벽 6시24분께 은 의원이 테러방지법과 거리가 먼 복지 사각지대 발언을 이어가자 새누리당 홍철호 원내부대표가 강하게 항의했다. 정갑윤 국회 부의장은 “의제와 관련 없는 내용을 자제해 달라”며 제지했다. 은 의원이 오전 11시26분께 유성기업 파업 당시 경비용역들의 폭력을 얘기하자, 새누리당 김용남 원내대변인이 삿대질을 하며 또 다시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은 의원은 “의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왜 정부가 테러방지법에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면서, 실제 폭력에 노출돼 있는 시민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느냐”고 맞섰다. 특히 김용남 의원이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고 소리치자, 은 의원은 “김용남 의원은 공천 때문에 (그렇게) 움직이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은 의원은 허리와 다리가 아픈 듯 허리를 굽히거나 좌우 다리를 번갈아 짚으며 몸을 풀면서도 반대토론을 끊지 않고 있다. 이석현 국회 부의장은 본회의장이 텅텅 비자 “여당 의원들이 너무 없다. 이럴 때 표결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야당 의원들로는 표결을 위한 재적의원 과반을 채울 수 없어 표결은 불가능하다.
김광진 의원은 5시간 넘는 사이에 입 주변 수염이 거뭇하게 솟기도 했다. 은수미 의원은 단정하던 머리가 9시간을 넘기며 헝클어졌다. 이후 반대토론을 준비하는 의원들로는 박원석 정의당 의원, 더민주 유승희, 최민희, 강기정, 김경협 의원 등이 있다. 박 의원은 관련 도서 3권을 들고 단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 10시간 넘게 ‘필리버스터’ 은수미 의원은 누구?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 법안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재개한 한일회담 소용돌이 속에서 야당 의원 김대중은 ‘나홀로 온건’ 소신으로 ‘사쿠라’ 오해도 받았지만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그해 4월20일 야당 의원 김준연 구속동의안을 5시간19분 동안의 의사진행발언(필리버스터)으로 무산시키며 ‘명연설가 김대중’을 각인시켰다. 이희호 역시 안팎의 비난을 함께 감내하며 남편의 소신을 지지했다. 사진은 1967년 7대 의원 시절 재경위원으로서 국회 본회의장에서 질의하는 김대중.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테러방지법 독소조항에 반대하며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3당이 필리버스터를 계속한 24일 낮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시간18분 동안 발언한 뒤 발언대를 내려오며 눈물을 흘리자 동료 의원들이 다가와 끌어안으며 위로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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