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 탄생’ 급박했던 3일…작년 10월26일 전후 무슨일이
역사는 단 3일 만에 이뤄졌다. <한겨레>가 29일 입수한 대기업 내부 문건의 시나리오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됐다. <한겨레>는 모금 및 설립 과정에 숱한 의문점을 낳고 있는 미르재단이 실제 어떻게 설립됐는지 재점검해봤다. 이를 위해 대기업의 내부 문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기업들에 보낸 이메일, 설립 과정에 참여한 기업체 인사 등을 다각도로 취재했다. 취재 결과 재단 등기 완료 및 현판식이 설립 신청서를 내기 이미 사흘 전에 정확히 예고돼 있었다. 이 시간표에 무리하게 맞춰 추진된 미르재단의 설립 절차는 상상을 초월하는 편법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흘 동안 군사작전을 수행하듯 긴박하게 진행된 재단 설립 과정을 재구성했다.
# 2015년 10월25일 오전
그날은 10월 마지막주 일요일이었다. 직장인 대부분이 회사를 쉬었다. 더러는 절정인 단풍 구경에 나섰다. 여느 휴일과 다를 바 없는 한가한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부터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 사회본부는 휴일을 잊은 채 분주했다. 미르재단의 설립 실무를 떠안은 이들은 재단에 돈을 내기로 한 18개 그룹에 긴급히 메일을 보냈다. 한 기업도 빠짐없이 재단 설립에 필요한 서류를 들고 다음날 오전 10시 서울 강남에 위치한 팔래스 호텔로 나오라는 요청이었다. 전경련은 기업들한테 파일로 된 출연증서를 보내 문서양식을 통일했다.
# 10월25일 오후
전경련의 연락을 받은 기업들도 바빠졌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업들은 그룹 차원에서 계열사에 지시를 내렸다. 그룹에서 전화를 받은 계열사 담당 임원들은 놀랐다. 이들은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다. 이어 착오가 없도록 내용을 정리한 메일이 일괄해 계열사에 내려갔다. 출연증서, 인감증명, 등기부등본 등 서류와 총회 회의록과 정관에 날인할 ‘사용인감’을 챙겨 다음날 지정된 시간과 장소로 나오라는 안내였다. 모두 전경련이 신신당부한 서류들이었다. ‘인가용’과 ‘법인설립용’ 1통씩 총 2통의 법인 인감증명이 필요하다는 전경련의 요청도 그대로 각 그룹을 거쳐 계열사에 전달됐다.
휴일날인데도 삼성, 현대차, 에스케이(SK), 엘지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열병식을 하는 군인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전경련은 기업들을 재촉했다. 설립신청 하루 전인 이날까지 18개 그룹의 어느 계열사가 재단 설립에 참여하는지 확정되지 않았던 탓이다. 전경련은 메일로 “부탁드릴 말씀은 오늘 중으로 어느 기업, 대표이사가 들어갈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재단 설립에 참여하는 그룹별로 매출액에 따라 모금액이 이미 할당됐지만, 정작 재단의 주인으로 참여하게 될 개별 기업은 정해지지 않았던 셈이다.
이날 그룹별로 계열사 명단을 받은 전경련은 다음날 배포할 회의록에 해당 기업과 대표이사의 이름을 박아 인쇄했다. 실제 회의가 열리지도 않았지만, 인쇄된 가짜 회의록에 기업들의 대표이사나 직책이 잘못 기재된 것도 너무 서두른 탓이었다.
# 10월26일 오전
18개 그룹의 임직원 50여명은 팔래스 호텔에 모여들었다. 전경련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오전 7시 연회장 하나를 예약해뒀다. 호텔 관계자는 “보통 조찬모임은 10시에 끝나지만, 이날은 뒤이어 미팅도 이어졌다”고 말했다. 전경련이 소집한 시각에 맞춰 기업들이 속속 도착했다. 미르재단이 설립 신청서류와 함께 문화체육관광부에 제출한 재산출연증서에 참석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들이 숨겨져 있었다.
호텔에서 30분가량 떨어져 있는 한화의 재경커뮤니케이션팀 강아무개씨는 이날 오전 8시9분에 증서를 출력해 호텔로 이동했다. 삼성물산과 삼성화재는 9시5분과 9시11분에 문서를 출력했다. 호텔까지 약 30분 거리에 있는 두산은 9시13분 관리본부에서 증서를 출력했다. 지각한 기업들도 있었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아예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10시27분에 문서를 뽑아 이동했다. 현장에 있었던 기업체 한 임원은 “재산출연증서 등을 작성해 이를 출력한 뒤 가느라고 시간에 쫓겼다”고 말했다.
미르에 적게는 2억원(아모레퍼시픽), 많게는 125억원(삼성)의 거액을 출연하는 기업들이 당일날 허겁지겁 서류를 챙겨 모여든 것이다. 좁은 연회장은 50여명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전경련 쪽 여성 법무사는 기업들이 들고 온 서류에 도장을 찍어댔다. 한 참석자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기업 관계자들이 가짜 서류에 인감을 찍는 자리인 줄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삼성, 현대차, 에스케이 등 그룹의 덩치 순서대로 미리 준비한 가짜 정관과 총회 회의록에 도장을 찍어 나갔다. 작은 그룹들은 일찍 왔더라도 뒤로 순서가 밀려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실제 재단의 정관을 정하거나 재단의 이사를 선임하는 회의는 없었다. 허위 서류에 도장 찍기는 오후 2시쯤 되어서야 끝났다.
# 10월26일 저녁
그 시각에 거의 맞춰 이번엔 문체부 담당 주무관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충북 오송에서 서울행 케이티엑스(KTX)에 몸을 실었다. 상관인 과장은 그에게 서울에 올라가 직접 서류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미르재단의 설립 허가권을 쥔 문체부가 전경련에 이례적으로 ‘출장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주무관은 오후 5시께 설립신청서를 전달받았다. 그는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서 세종로에 있는 문체부 서울사무실로 이동했다. 거기서 8시7분 문체부 문서등록시스템인 ‘나루’에 신청서류를 등록했다. 그의 상관인 사무관과 과장은 퇴근도 하지 않은 채 결재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서류 등록 3분 뒤 세종시 문체부 본부에서 사무관의 결재, 8시27분 과장 결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10월27일
다음날 아침 8시9분 콘텐츠정책관, 그리고 9시36분 콘텐츠산업실장의 전결로 미르는 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는다. 그리고 불과 4시간 조금 지난 시각에 미르재단의 현판 제막식이 서울 강남구 규우빌딩에서 열렸다. 언제 불렀는지 박근희 삼성 부회장, 박광식 현대차 부사장, 신승국 에스케이하이닉스 대외협력본부장, 조갑호 엘지 전무, 이홍균 롯데면세점 대표이사 등이 참석했다. 미리 준비한 용 문양을 앞세운 ‘재단법인 미르’란 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형수 이사장은 인사말을 했고, 박근희 부회장은 축사를 건넸다.
이 모든 일정은 전경련이 기업들에 미리 알린 대로 오차 없이 착착 진행됐다. 전경련은 미르재단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기도 전인 25일에 기업들한테 “27일 법인설립 등기 완료 및 창립 현판식이 열린다”고 알렸다. 실제 그대로 이뤄졌다. 사전에 잘 짜인 각본대로 기업과 정부 부처가 움직여준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본 대기업 관계자는 “이렇게 18개 그룹의 임직원 50여명을 휴일에 동원령을 내려 월요일 아침 한 장소에 모이게 해서 가짜 서류에 법인 인감을 찍게 할 정도의 힘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라고 물음을 던졌다.
이와 관련해 전경련은 29일 <한겨레>에 “지난해 10월26일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건 맞지만, 법무사가 참석해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다”고 밝혔다.
류이근 하어영 방준호 박수지 기자 ryuyigeun@hani.co.kr
서도식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왼쪽 선 이)이 2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미르재단과의 업무협약과 관련해 야당 의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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