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일 큰 화재가 발생한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해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대구/연합뉴스
주인의 열망을 대리인은 외면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결국 1일 본회의 안건으로 보고되지 못했다. 이르면 2일 가능했던 탄핵안 표결도 자동 무산됐다. 탄핵에 공조해온 새누리당 비박근혜계의 이탈이 결정적이었다. 전날까지 야권과 탄핵안 내용을 조율했던 비박계는 이날 친박계가 주도한 ‘4월말 퇴진, 6월 조기대선’이라는 수습책에 굴복했다.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는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가 나온 지 이틀 만이었다. 비박계의 전선 이탈은 야권의 자중지란으로 이어졌다. 1일 본회의 직전 만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대표는 언성을 높이며 책임을 떠넘겼다.
새누리당은 이날 오전 의원총회를 열어 박 대통령에게 내년 4월말에 사퇴할 것을 건의하고 6월에 조기대선을 치르도록 하는 방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탄핵 동참을 공언했던 비박계는 별다른 이의 없이 이 안을 수용했다. ‘국정 혼란 수습이 우선’이라는 이유였다. 한 달 이상 지속된 ‘촛불 민심’을 거스르며 정치시계를 촛불정국 초기 국면으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안정적 정권 이양을 위해, 최소한의 대선 준비 기간 확보를 위해 합리적 일정이라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은 앞으로 국회 추천 총리가 주도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는 문제를 야당 쪽과 협의한다는 방침이다. 촛불 정국 초기 수습책으로 제시됐던 방안들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결국 앞으로 5개월간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논의가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자신이 국정농단의 몸통이라는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나고, 1·2차 대국민 담화도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새누리당이 이 무거운 진실을 무력화하는 데는 ‘질서’라는 두 글자면 충분했던 것이다.
탄핵 공조를 앞장서 이끌어야 할 야권의 ‘맏형’ 민주당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도부는 좌충우돌하고, 의원들은 우왕좌왕했다. 원내 지도부가 새누리당 비박계 설득에 공을 들이던 지난 23일, “탄핵표를 구걸하지 않겠다”며 공조 분위기에 찬물을 뿌린 추미애 대표는 이날 아침 ‘임기 단축 협상은 없다’던 전날 야 3당 대표 합의를 깨고 비박계 좌장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단독 회동을 했다. 회동 뒤에는 ‘탄핵 동참을 설득하려고 갔다’던 설명과 달리 “대통령 사퇴는 늦어도 1월말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해 ‘임기 단축 협상을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자초했다. 뒤늦게 “1월말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마무리되는 시점을 언급한 것”이라며 무마를 시도했지만, 추 대표의 말은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당 지도부는 서둘러 의원총회를 열어 ‘2일 표결을 위해 탄핵안 발의를 강행한다’로 당론을 모았다. 문제는 이미 비박계가 탄핵안 발의 불참을 공식화하고, 국민의당도 2일 표결에는 난색을 표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발의 정족수(재적의원 과반) 확보가 어려워 탄핵안의 2일 표결이 무망해진 시점이었지만 ‘촛불 민심’을 의식해 ‘알리바이 만들기’에 나섰다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었다.
일찌감치 ‘사퇴’와 ‘탄핵’을 당론으로 정한 국민의당은 정작 논의가 본궤도에 오른 뒤에는 ‘바람 앞의 갈대’ 같았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견주며 부단히 재고 머뭇거렸다. “탄핵에 앞서 국회가 총리를 먼저 선출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릴 때부터 조짐은 있었다. 청와대가 ‘총리 추천 제안’을 거둬들이고 야권 기류가 ‘탄핵’으로 정리된 뒤 ‘총리 선출’ 카드는 접었지만, “사퇴 시기를 국회가 정해달라”는 박 대통령의 3차 담화 뒤 또다시 휘청였다. 차기 비상대책위원장인 호남 중진 김동철 의원이 “대통령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며 운을 뗐고, 박지원 비대위원장도 “자진사퇴가 최선이지만, 대통령이 거부할 것이 분명하니 탄핵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펴며 ‘선회’ 여지를 남겼다. 국민의당은 이날 본회의가 끝난 뒤 ‘5일 탄핵안 처리’라는 정동영 의원의 절충안을 제시했지만, 애초 비박계의 불참을 핑계로 탄핵 카드를 거둬들이려 했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은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정치권을 ‘탄핵 열차’에 탑승시킨 것은 촛불 민심의 힘이었다. 대통령 입에서 ‘임기 단축’이란 조건부 항복 선언이 나온 것도 촛불이 이뤄낸 진전이었다. 하지만 정치권은 대통령의 그 한마디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탄핵안 처리의 남은 기회는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예정된 9일까지다. 시민들이 믿을 것은 이번 주말 다시 타오를 촛불뿐이다. 광장을 채우고 넘칠 그 촛불은 이제 국회를 향해 밀려들 수 있다.
이세영 이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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