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습니다. 그들이 최고권력자일 경우에 그 날개는 더 크고 눈부실 겁니다. 정치적 사형 선고로 불리는 탄핵 등으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 그들은 날개를 접고 어떤 말을 남겼을까요? 역사상 권좌에서 중도에 쫓겨난 몇몇 최고권력자들의 퇴임사를 분석해봤습니다. 총칼을 앞세우던 과거와 달리 정치적 수사를 몸과 피로 삼던 최고권력자들의 퇴임사는 그들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정치적이었습니다.
정치인에게 탄핵은 ‘죽음’이다. 법적 절차를 밟아 탄핵이 집행되는 순간, 탄핵 대상자가 재임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어도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끝나기 때문이다. 탄핵 뒤 탄핵 대상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법처리나 유폐, 심하게는 죽음이었다. 역사적으로 탄핵 뒤 다시 재기에 성공한 권력자는 드물었다.
하지만 탄핵으로 권력의 무대에서 끌려 내려오는 순간, 권력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의외다. 마음을 비운 현자의 직관보다는 한판 붙어보려는 범부의 미련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지율이 높거나 낮거나 상관없이 반발의 강도는 셌다. 탄핵이라는 정치적 사형 선고가 집행되는 순간에도 그들의 권력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 뒤 국무위원들과 한 마지막 회의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한 것도 아마 이런 맥락이 아닐까.
1974년 8월19일(현지시각)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직 사임 연설을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가난한 촌뜨기 닉슨이 박근혜와 닮은 까닭
미국의 대통령은 흔히 ‘선출된 로마 황제’에 비유된다.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영향력은 그만큼 막강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미국의 역대 대통령 44명 가운데 탄핵의 무대에 올랐던 사람은 17대 앤드루 존슨, 37대 리처드 닉슨, 42대 빌 클린턴 등 모두 3명이다. 존슨과 클린턴은 탄핵안이 가결되지 않아 자리를 지켰지만 닉슨은 1974년 8월 탄핵 직전에 사임했다.
미국 최초로 사임한 대통령인 닉슨은 여러모로 박근혜 대통령과 판박이다. 가난한 유년을 보냈던 닉슨이 10대 때부터 공주로 자란 박 대통령과 무엇이 비슷할까?
닉슨은 1946년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면서 반공주의자로 명성을 얻었다. 덕분에 정치 신인임에도 전쟁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발탁돼 1952년 39살이란 젊은 나이에 부통령으로 당선됐고 연임까지 했다.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1972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닉슨은 재선 당시 민주당 후보 쪽에게 20%가량을 앞서고 있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리는 불법 선거운동을 벌였다. 이런 불법 행위엔 그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밥 홀드먼 비서실장 등 캘리포니아 출신 인사들이 연루됐다. 당시만 해도 캘리포니아는 미국 정치의 변방이었고, 닉슨은 오랫동안 자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닉슨은 순순히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재선 뒤 언론에 의해 제기되는 불법 행위 의혹에 대해 한결같이 부인했고 언론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수사하는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불법 선거운동과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던 것은 물론 검찰 수사를 부인하는 것도 박근혜 대통령과 흡사하다.
2년 이상 버티던 닉슨은 탄핵안이 발의되고 자신이 속한 공화당 의원마저 탄핵에 찬성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돌연 사임했다. 후임인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사임 한 달 만에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닉슨을 전격 사면했다. 후진국에서나 벌어질 법한 저열한 정치 사건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만큼 당시 미국의 정치 환경은 어수선했다. 대통령 선거 운동에 정보기관은 물론 마피아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이 암살되는가 하면 유력 대선 후보가 선거 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적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도청 사건으로 낙마한 닉슨은 억울할 법도 했다. 당시 그의 지지율은 20%가 넘었기에 더 억울했을지 모른다. 퇴임사에는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닉슨은 퇴임사에서 “나는 무슨 일이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quitter)이 아니다. 임기가 끝나기 전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진행되는 수개월 동안에도 나의 주장이 옳다고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라고도 했다. 퇴임사에서 자기가 잘못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다. 대신 그는 퇴임의 이유로 국익을 들었다. 타락한 대통령의 마지막 양심으로 지적되는 대목이다.
법률가 출신인 닉슨이 범법 행위를 수사하는 국가기관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막아놓고 오히려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고 억울해한 것은 사뭇 역설적이다. 부통령 8년, 대통령직도 5년 넘게 수행했던 그였다. 실제로 그는 퇴임 뒤 지인들을 만나면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닉슨은 정치학자나 언론학자뿐 아니라 심리학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로 꼽힌다. 심리학자들은 그가 의심이 많고 음험한 사람이라고 분석했다.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독일 ‘소액매수’ 대통령의 허망한 퇴임사
냉전시대 공작정치의 음험함이 사라진 최근까지도 닉슨과 비슷한 최고권력자는 적지 않았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독일의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 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는 닉슨처럼 도청, 정치공작 같은 음험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직위를 이용해 각종 특혜를 받은 혐의로 5년 임기의 절반이 지난 2012년 2월 사퇴했다. 닉슨처럼 그의 비리 역시 언론 보도로 폭로됐고 언론과 맞서다 망신을 자초했다.
2010년 취임한 불프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보수정당인 집권 기독교민주연합 부대표 출신으로, 2008년 주총리 시절 주택 구입을 위해 기업으로부터 50만유로 사채를 현저하게 낮은 금리로 끌어 쓰는 등의 특혜를 받았다. 이 밖에도 자동차를 사는 데 큰 폭의 할인을 받거나 지인들의 도움으로 한 푼도 쓰지 않고 호화 휴가를 즐겼다는 ‘소액매수’ 사건이 연이어 언론에 폭로됐다. 그는 완강히 버티다가 검찰이 수사에 적극 나서고 야당이 탄핵카드를 만지작거리자 사퇴 의사를 밝혔다. 독일 검찰이 의회에 대통령의 면책특권 정지를 요청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불프의 퇴임사도 닉슨과 비슷했다. 불프 대통령은 “독일은 폭넓은 신뢰를 받는 대통령이 필요한데 지난 몇 주간 상황은 신뢰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고 이에 모든 책임을 느낀다”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각종 특혜 의혹에 대해선 “공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법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해왔다”며 “실수를 저질렀지만 언제나 정직했다”고 말했다. 그는 2년 뒤인 2014년 2월 지방법원에 의해 부패 혐의를 사면받았다.
이승만은 4·19 직후에도 부정선거의 책임을 부인했고 사퇴 의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설득으로 하야를 결심했다. 하야 성명에서 그는 6500여명의 사상자가 난 4·19 혁명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 리승만, 애국·애족 동포 위해 하야”
민주주의 역사가 뿌리깊은 미국과 독일의 부도덕한 권력자는 나름대로 해명을 하는 등 최소한의 양심이 있었지만 제3세계 국가들의 쫓겨난 권력자들은 대부분 확신범이었다. 불법 행위도 도덕적 비난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60년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표적이다.
이승만 정부는 조직적으로 자행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총을 쏴 4월19일부터 그가 하야하던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사망 186명, 부상 6259명의 많은 사상자를 냈다. 사망자의 41.4%(고교생 36명, 대학생 22명, 중학생 이하 19명)는 꽃다운 학생들이었다.
65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났음에도, 이승만은 하야 성명에서 부정선거나 발포책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명에서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다”며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다음날 국회에 제출한 사임서에는 “나 리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겠다”고 했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구를 바치겠다고 말했던 그는 그해 5월말 새벽 미국 하와이로 몰래 도피했다.
독재나 명백한 불법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기득권층과 갈등을 빚다 탄핵을 당한 정치인의 퇴임사는 훨씬 강렬하다. 올해 8월31일(현지시각) 탄핵이 확정된 브라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의 퇴임사는 절규다. 그는 정부 회계법을 위반했다는 연방회계법원의 판결을 근거로 탄핵돼 당선된 지 2년 만에 물러났다.
젊은 시절 반정부 게릴라 여전사였던 그는 1960년대 군부독재 시절 3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그는 총알은 피했어도 탄핵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는 탄핵이 확정됐을 때 “탄핵은 국회의 쿠데타”라고 말하며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권력자의 퇴임사가 모두 기세등등했던 것은 아니다. 권력자의 등을 떠밀던 세력이 살기등등한 군부 쿠데타 세력이라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총칼로 집권한 군부에 의해 등 떠밀리듯 하야한 대통령의 퇴임사는 자신의 뒤를 이을 독재자의 눈치를 살폈다.
1980년 8월 한국의 10대 대통령 최규하의 하야 성명은 군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했다. 10·26 이후 혼란기를 효과적으로 수습했다는 내용이었다. 퇴임 성명의 절정은 신군부의 2차 쿠데타인 5·17로 생긴 군사통치 체제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내각과 함께 사회 정화와 개혁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이다. 대통령인 자신을 쫓아낸 정변과 군부를 찬양한 셈이다. 당시 국보위 위원장은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최규하가 하야한 지 11일 만인 8월27일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4대 대통령 윤보선의 퇴임 성명도 비슷했다. 그는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던 1961년 5월 “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했다”며 “다행히 하늘이 도와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해 나는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 1793년 사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코먼스
앙투아네트, 죽기 전까지 혁명 인정 안해
물러나는 최고권력자의 퇴임사가 가식적인 말들의 성찬인 것은 이들이 적어도 생물학적 생명은 잃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으나, 과연 혁명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왕들의 유언도 현대 정치인들의 퇴임사처럼 정치적 수사로 이뤄졌을까? 죽음을 앞둔 그들이 남긴 말은 현대의 권력자와 다르지 않았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반역자로 처형된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언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혁명 직후 비교적 선량한 왕으로 평가받던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통해 새로운 프랑스 건설을 꿈꿨다. 하지만 1791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던 콩트 드 미라보가 급사하고 이에 불안을 느낀 왕이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려다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1792년부터 공화파들은 9월 왕정을 폐지한 뒤 국민공회를 만들어 프랑스 제1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공화파들은 1793년 1월 재판을 열고 루이 16세를 반란죄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해 처형했다.
루이 16세는 사형 전에 신부의 입회 아래 유언장을 썼다. 유언장에 그는 자신을 ‘프랑스 왕’이라고 썼다. 그는 아들에게 불행히도 왕이 된다면 오직 법으로 다스릴 때만 국민들이 행복하다고도 당부했다. 또 파리 혁명광장에서 처형될 때 그는 “나는 죄없이 죽노라. 당신들의 국왕이 당신들을 위해 죽는다”고 말했다. 왕으로서 나름 당당한 최후일지 몰라도, 왕정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프랑스 왕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로 혁명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언도 남편과 비슷했다. 왕실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남편처럼 혁명을 부인했다. 앙투아네트는 남편이 사형에 처해진 뒤 9개월간 더 갇혀 있다가 10월14일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이틀 만에 사형됐다. 그는 사형 당일 새벽에 편지글 형식의 유서를 작성했다.
앙투아네트는 남편인 루이 16세가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공식 애인을 두지 않은 금욕적 생활을 했던 것과 달리 스캔들이 많았다. 특히 스웨덴 백작 페르센과의 염문은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유언장에 “아이들에게 우리 부부를 본받아 힘을 합쳐야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고 전해달라. 우리 부부는 불행한 순간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을 줬다”고 적었다.
또 그는 “어릴 적부터 믿어왔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혁명 이후)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종교에서 어떤 영적 위안을 갖지 못한다”며 “국민공회 쪽에서 사제를 데려오겠지만 나는 사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이는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사제들을 일종의 공무원으로 임명한 혁명 정부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새는 죽을 때 그 노래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말이 선하다”는 말이 <논어>에 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말은 진실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사람들의 말은 정치적 사형 선고나 육체적 사형 선고가 집행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중에 보면 허망하기까지 한 정치적 수사로 가득했다. 죽을 때까지도 그들은 그렇게 정치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