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일 오전 9시30분 피의자 신분으로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석했습니다. 피의자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이 부회장은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대가로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씨와 딸 정유라씨,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 재단 등에 300여억원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을 상대로 최씨에 대한 지원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조사할 예정입니다. 또 특검팀은 국회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이 부회장을 위증 혐의로 고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지난해 12월6일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출석한 이 부회장이 알면서도 모른 척, 거짓말을 한 혐의가 있다는 겁니다.
당시 이 부회장은 온종일 ‘저자세’로 일관하며 연신 “송구하다” 말했지만 대부분의 질문에 동문서답하거나 우물쭈물하기 일쑤였습니다. 의도된 우둔함이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최순실을 언제 알았냐”는 간단한 질문에도 눈을 굴리며 말을 잇지 못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버텼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압박성 질문을 이어가자 “2016년 2월 알았던 것 같다”고 겨우 답했지만 최근 특검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늦어도 박 대통령을 독대한 2015년 7월에 최씨의 존재를 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부회장은 재단 출연금의 대가성, 합병과 자신의 경영권 승계 관련성은 단호하게 부인했습니다. 어떻게든 뇌물공여 혐의를 피하려 애쓴 모양새지만 결과적으로는 위증 혐의를 하나 더 얹게 됐습니다. 지난달로 시간을 돌려 이 부회장이 당시 어떤 말을 했었는지, 왜 위증 혐의를 받는지 정리해봤습니다.
ㅣ최순실 인지 시점 여부
“2015년 7월에는 최순실 몰랐다. 2016년 2월 언저리쯤에 알았던 것 같다”
이 모든 게 최순실을 몰랐다면 없었을 일인지도 모릅니다. 최씨를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부회장은 청문회 초반 황영철 바른정당 의원이 “박 대통령과 독대했던 2015년 7월에 최씨 존재를 몰랐냐”고 묻자 정확하게 “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2016년 2월에는 알았냐”니까 “그 언저리쯤이 아닌가…언제 정확히 내가 알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겠”답니다. 이후 이용주 국민의당 의원이 다시 “2015년 3월 삼성이 대한승마협회 회장사가 됐을 때 정유라가 누군지 알았냐”고 묻자 “몰랐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삼성이 ‘최순실 회사’ 코레스포츠에 송금하기 시작한 2015년 9~10월께 최씨를 알았냐는 질문에는 “정말 내가 언제 알았는지,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몰랐던 시점은 확실한데 알았던 시점은 불분명한 ‘선택적 기억상실’에 걸린 걸까요.
그의 핵심참모인 장충기 사장, 최지성 부회장 중 누구한테 최씨 이야기를 들었냐는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문에는 아예 “사람을 언제 알았는지 기억한다는 게…”라며 동문서답합니다.
황영철 의원은 이런 이 부회장을 향해 “대통령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서 권력을 누렸다는 최순실과 관련해 계속 삼성과 관련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재용 증인이 최씨를 안 시점조차 모른다고 이야기하면 국민이 이해하겠나.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실마리는 청문회가 끝나고 나서야 드러났습니다. 지난해 12월21일치 <한겨레> 단독 보도를 보면 특검은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독대한 2015년 7월께 최씨가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지한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검찰이 압수한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의 휴대전화 통화내역 등 각종 자료에서 박 사장이 최씨 모녀 지원 상황과 관련해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이 부회장과 지시 및 보고 관계에 있는 흔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ㅣ박 대통령과 사전교감 여부
“박 대통령 독대 때 재단출연·합병 관련 이야기 없었다”
이 부회장은 그동안 박 대통령과 총 3차례 독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4년 9월, 2015년 7월, 2016년 2월입니다. 이 중에서도 2015년 7월 25일 이뤄진 독대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세 사람의 뇌물공여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독대 전후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흘러가는데요, 7월10일 삼성물산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 합병 찬성을 결정합니다. 17일에는 통합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됩니다. 특검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20일에는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이 김종 당시 문체부 차관과 만납니다. 같은 날 박 대통령은 안종범 당시 정책조정수석에게 대기업 회장들과의 단독 면담 추진을 지시합니다. 특검은 20~24일 사이 최지성 부회장과 장충기 사장, 박상진 사장이 만나 정유라 승마 훈련 지원 로드맵을 논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독대 뒤인 2015년 9월 삼성은 최씨가 독일에 세운 회사인 코레스포츠에 37억원을 직접 송금합니다. 최근 공개된 삼성-코레스포츠 계약서에 따르면 삼성이 정유라에게 주기로 계약한 돈은 총 220억원에 달합니다. 삼성은 미르재단에 125억원, 케이스포츠재단에 79억원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가성 여부에 대한 실마리도 어느 정도 드러난 상황입니다. 최근 <한겨레> 단독 보도를 보면 독대 당시 ‘대통령 말씀자료’에 “우리 정부 임기 안에 삼성의 후계 승계 문제가 해결되기 바란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이 부회장 지배력 강화” 등의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더구나 합병 한달여 전에 작성된 승마협회 문건에 삼성이 정유라에 총 228억원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드러나면서 합병 전 이미 ‘사전교감’이 이뤄진 게 아니냐는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자, 그럼 청문회장에서 이 부회장은 이 독대 자리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요. 박 대통령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의원들이 묻자 이 부회장은 “문화융성,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 기업들도 열심히 지원을 아낌없이 해달라. 창조경제혁신센터에 대한 활동을 더 열심히 해달라고 말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당시 독대 자리에서 ’재단’이나 ’합병’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답변합니다. “강압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냐”는 이만희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는 “독대 당시에는 무슨 얘기였는지 잘 솔직히 못 알아들었다”는 황당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뇌물공여 범죄자보다는 차라리 바보가 되기로 맘먹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ㅣ대가성 여부
“사회공헌이든 출연이든 단 한 번도 무엇을 바란 적 없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갖는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면 제일모직은 과거에 삼성에버랜드였습니다. 이름이 바뀐 것이죠. 따라서 이재용 부회장은 가지고 있는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제일모직의 주식으로 갖고 있었고요.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 그룹의 지주회사였습니다. 따라서 이 두 회사의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의 재산을 그룹 전체의 사실상 지주회사의 주식으로 바꾸는, 삼성그룹의 3세 승계 과정의 완성지는 아니지만 거기로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1차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나왔던 김상조 한성대 교수의 말입니다. 이만희 의원의 말마따나 “많은 국민들은 삼성의 재단출연 등은 순수한 선의가 아니라 그룹의 안정적인 승계권을 포함한 모종의 이득에 대한 대가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인의 경영권 승계를 돕기 위해 전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함부로 동원된 셈입니다. 전모를 밝혀 책임을 물어야할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이미 지난해 말 국민연금에 ‘합병 찬성’ 압력을 가한 혐의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구속됐습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청문회장에서 ‘순수한 선의’를 강조했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지원 요청이 들어오지만
“단 한 번도 무엇을 바란다든지 반대급부를 요구하면서 출연을 하거나 지원을 한 적은 없다”는 겁니다.
재단은 그렇다 치고 정유라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했을까요.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유라에게 왜 19억짜리 말을 사줬냐”고 묻자 이 부회장은 “뭐라고 질책해도 변명할 게 없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직원에게)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무엇인지 수차례 물었지만 이 부회장은 “뭐가 있어도 우리가 잘못했다” “절대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 “국민 여러분께 정말 많은 실망을 시켜드려 내 자신이 창피스럽다” 등의 말만 늘어놨습니다.
ㅣ본인 인지·연루 여부
“나한테 일일이 보고를 하지 않는다”
“300억원이 껌 값입니까!”(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미르·케이스포츠재단과 최순실 쪽으로 넘어간 삼성의 돈을 다 합치면 300억원입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회사 차원에서도 적은 액수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부회장은 사전에 전혀 몰랐고 사후에야 보고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재단 출연금은) 문제가 되고 나서야 챙겨봤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전경련 회비 내듯 으레 내는 것으로 알고 냈다고 했다” “나한테 일일이 보고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부회장이 아니라면 누가 이 큰돈을 책임졌던 걸까요.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지성 사장과 김종중 사장을 거의 매일 아침 보는데 이런 것도 보고 안 했냐. 그분들이 돈을 빼돌린 것이냐”며 이 부회장을 강하게 몰아쳤습니다. 진실을 길어올리기 위해 “그분들이 이 부회장을 왕따시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고까지 말했지만 이 부회장은 여전히 “나는 몰랐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일이 사실로 밝혀져도 이 부회장만큼은 빠져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일까요. ‘송구재용’은 특검 조사를 마치고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