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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87년 쟁취한 자유, 이제 ‘강자의 자유’만 남아

등록 2017-01-30 19:44수정 2017-01-30 20:24

[1987~2017 광장의 노래]
3부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다 ①-민주주의도 통역이 되나요?
‘세대별 민주주의 전문가’ 4인 좌담
민주주의 국가에 살지만 누구도 충분히 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에서, 광장은 민주주의를 몸으로 느끼는 사실상 유일한 공간이다. 촛불이 꺼지고 광장이 닫히면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질문을 할 수 없고, 경멸과 무시의 대가로 돈을 벌며, 진정 필요한 능력이 무언지 모르지만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하는 세상. 우리는 어떻게 광장을 지나 일상의 민주주의를 맞이할 수 있을까. <한겨레>가 민주주의를 주제로 진행한 ‘세대별 그룹 인터뷰(FGI)’를 ‘소셜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아르스프락시아가 키워드 분석을 했고, 정치·사회·경제 전문가 4명이 이 분석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견을 나눴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박권일 사회비평가, 이관후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23일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 마주 앉았다.

<한겨레>가 민주주의를 주제로 진행한 세대별 그룹 인터뷰 결과를 놓고 정치·사회·경제 전문가 네명이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이관후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박권일 사회비평가.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가 민주주의를 주제로 진행한 세대별 그룹 인터뷰 결과를 놓고 정치·사회·경제 전문가 네명이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이관후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박권일 사회비평가.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비민주의 뿌리, 물질주의

이관후 우리는 광장에서 승리하고 일상에서 패배해왔다. 예전엔 민주화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 민주화하면 다 잘될 것이라는 믿음. 10년 뒤 맞은 게 경제 위기, 아이엠에프(IMF)다. 이거 뭐지? 임시방편으로서 근본적인 성찰 아니고 일단 정권교체를 해본다. 10년 지나, 노무현 정부 끝나고 민주화 신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민주주의 별로 좋은 게 아니다, 돈 갖다 주는 게 좋은 거구나, 하고. 지금 다시 세 번째 회의가 왔다고 본다.

김도훈 민주주의 가치가 구체화하지 못한 것이 오늘 위기다. 왜 일상에서 패배했는가. 1987년에 보통 선거권만 확보했고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1987년 체제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쉽게 생각하고, 일상적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노력을 등한시했다.

김공회 우리에게 민주화보다 아이엠에프가 더 영향을 준 경험 아니었을까. 뭐가 더 중요했을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민주화는 제한된 세대, 제한된 그룹이 주도했지만, 아이엠에프는 누구나 맞아야 했으니까.

박권일 사실 모든 세대가 민주주의에 대해 관념적, 추상적이다. 현실에서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해결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외부에서 지켜야 할 것, 물화된 사물로 민주주의를 생각하니까. 한국은 비슷한 국내총생산(GDP) 규모 국가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물질주의가 높다. 소득이 높아지면, 보통 삶의 질적인 부분으로 관심사가 옮아가는데 우리는 물질에 대해 여전히 집착, 강박이 심하다.

이관후 우린 압축성장을 했다. 소득 수준 높은데도 삶의 방식이 다양화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면, 같은 그래프라도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디피가 올라가도, 같은 세대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 다른 나라는 공황, 불황 겪어도 한 세대 한 번인데, 우린 굴곡이 많다. 1970년대 말에 오일쇼크 겪고, 또 같은 세대가 아이엠에프 겪는다. 지금은 또 헬조선이다. 압축 성장했는데 복지 체계는 없다. 복지가 없는데도 정부는 복지를 철회한다. 각자도생의 세대가 됐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돈을 버는 행위’다.

김도훈 전 세대가 물질주의다. 프랑스 혁명 과정을 보면 권력 구조를 바꾸었다고 만족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다. 이성에 대한 숭배와 함께, 종교 구조를 바꾸려 했다. 교육도 새로운, 대안적 인간을 만들려 했다.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아이엠에프 상황에서 돈이 최고라는 믿음과 체계 갖게 됐다.

스칸디나비아 복지 국가 국민들이 50% 세금을 내면서도 자긍심 갖는 이유를 봤더니, ‘고마운 체험’을 하더라. 국가가 의미 있다는 체험을 학교와 병원에서 한다. 반대로 한국은 학교라는 공간이 고마운 곳인가? 입시만 보게 하는 심리적 폭력, 영혼의 폭력이 있는 공간이다. 학교가 매개로서 민주주의 교육을 선사할 것인가? 문제의식이 든다.

이관후 386세대는 비민주적 경험, 독재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으면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20대로 갖고 내려오면, ‘강자의 자유’만 남는다. 정유라의 자유. 또 이재용의 자유. 20대가 386과 공감 못 하는 이유가, 그때(과거)는 민주주의를 자유라고 이야기했는데, 자유의 결과가 이렇게 돼버린 거다. 결국 부모가 돈 많은 놈의 자유다. 30~40대는 공부, 조직, 기업 통해 사회적 계층 상승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럼 뭘 잘해야 되느냐? 민주주의 좋아하는 놈은 절대 좋은 고과를 받지 못한다. 열심히 충성하는 놈은 좋은 고과를 받는다. 30~40대에게 경영방식, 기업문화는 철저히 비민주적이다.

늘 광장서 승리하고 일상서 패배
기업문화 철저하게 비민주적
민주주의 말하면 ‘나쁜 고과’

돈이 최고라는 물질주의가 뿌리
결국 부는 편중, 사회는 초엘리트화

사장이 알바에게 갑질하지 않고
비정규직 부모도 자녀에 대우받는
‘잘나가지 않아도’ 존엄하는 세상이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이 아닐까

# 능력주의가 아니라 출신성분주의다

박권일 한국의 직장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일을 해서 버는 게 아니라 모멸감, 억압을 버텨서 월급 받는 거라고. 상사가 주는 경멸의 대가로 이 돈을 타 간다고. 20대는 수능 점수 집착이 더 심해졌다. 한국 사람들, 순위에 환장한다. 댓글에도 등수 만들고. 이를테면 능력주의가 지배한다. 내 능력보다 못한 애들이 대우를 받으면 안 되는 거다.

김도훈 악순환 고리를 끊는 숨은 열쇠는 아까 박권일 선생님 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능력주의에서. 수능 점수가 능력을 대변해서가 아니라 표식 통해서 능력처럼 보이게 하는 시스템에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출신성분주의가 능력주의로 포장돼 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위기는, 민주주의 폐해가 아니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못 해서다. 능력주의조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이관후 성과, 능력주의 이야기하면 근본적으로 평등한 가치 같다. 경쟁 사회에서 성과대로 평가받는 게 공정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건 능력주의 아니다. 출신성분주의, 즉 스펙주의다. 이른바 지잡대(지방잡대)라고 불리는 대학을 나와서 유럽에서 성공한 음악가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유학 가서는 아무도 출신 대학을 묻지 않고, 목소리를 들으려 하더군요.’ 한국에선 서울대 출신 부장이 일을 하면 잘한다고 생각한다, 잘 못해도 포텐(가능성)이 터질 거라고 기대한다. 출신성분주의가 능력주의로 포장돼 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위기는, 민주주의 폐해가 아니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못 해서다. 능력주의조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김공회 최근에 세계적으로 불평등 논의가 많이 되고 있다. 2014년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책이 나오면서다. 피케티가 말하는 게 자본주의가 더 나빠져서, 세습 자본주의로 가고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 미덕은 성과주의인데 이 미덕조차 훼손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이게 민주주의의 훼손이다.

박권일 왜 우리가 능력 키우는지 ‘목적’을 생각지 않는다. 한국에선 생산성 높이면 무조건 훌륭한 조직이다. 정의라는 관점에서,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이야기하듯 최소 수혜자, 즉 사회에서 가장 덜 수혜 받는 사람에게 최대 수혜를 주는 것이 좋은 사회다. 소수가 큰 파이를 받는다고 좋은 사회라 볼 수 없다. 능력주의 실현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근본적 합의를 해야 한다. 지금은 과잉 능력주의다. 능력 없으면 ‘충’ 취급 받는다.

# 잘 나가지 않아도 존엄할 수 있는 세상

이관후 지난해 말 민주화 이후 국회의원 당선자 분석했다. 이들의 학력, 경력, 재산이 굉장히 급속도로 어마어마하게 엘리트화됐다. 2010년 기준으로 국회의원 평균 연령대인 55~59살의 일반적 학력 분포는 고졸 이하가 81.9%. 그런데 조사 당시인 18대 국회의원은 대졸 이상이 97.6%다. 괴리가 엄청나다. 국회의원들 보면 50대 남성, 법조인, 공무원, 서울대 출신이 보통사람이다. 민주화가 됐지만 결국 부는 편중되고 사회적으로는 엘리트, 초엘리트화되고.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이건가? 허무하고 냉소적이다. 최근에 정치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아이엠에프 이후 우리 사회가 ‘세습 귀족제’로 복귀하고 있다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실제로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

“일단 중간(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구체적, 현실적 어젠다를 만들어야 그게 민주주의 아닐까.”

김도훈 30~40대는 과잉 능력주의로 짜인 사회에서 인정투쟁을 해왔다. 이게 어디서 비롯하냐면 ‘무시’다. 무시 때문에 투쟁이 치열해진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아니라 ‘비존중’을 없애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2000년대 초반에 뇌리에 남는 텔레비전 광고가, ‘렉스턴’ 쌍용자동차다. 처음으로 ‘대한민국 1%’ 이런 말이 나왔다. 아이엠에프 이후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과 함께 사회를 전도시키는 가치가 ‘1%’다. 사회적 어젠다를 바꿀 때가 됐다. 엘리트주의에 브레이크를 걸고, 대한민국 50% 부모가 자랑스러운 사회. 일단 중간(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자식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구체적, 현실적 어젠다를 만들어야 그게 민주주의 아닐까.

“지금 1% 엘리트 계층도 회사에서 모멸적 대우를 받으면서 억대 연봉을 받는다. 상사한테 개새끼 욕 듣고. 이게 정상적인 사회인가.”

박권일 한 단어로 말하면 노동권, 사회적 권리 이런 걸 통합하는 디그니티, 즉 존엄이 필요하다. 굳이 잘나가지 않아도 존엄한 사회로 가야 한다. 지금 1% 엘리트 계층도 회사에서 모멸적 대우를 받으면서 억대 연봉을 받는다. 상사한테 개새끼 욕 듣고. 이게 정상적인, 옳은 사회인가? 존엄이 뭔가. 알바 사장이 갑질하지 않는 것, 근로계약서 쓰고 우리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절차들을 실천하는 게 존엄이다.

# 세대갈등이라는 오해

이관후 삶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 노동과 복지 두 가지가 우리 사회 당면 과제다. 세대간 이해하고 화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콘텐츠다. <표심의 역습>이란 책을 보면, 50대는 우리 생각과 달리 임금피크제 등으로 일자리를 나눌 준비가 돼 있다. 20~40대는 노인 부양하고 세금 더 낼 준비가 돼 있다. 정치 엘리트들이 문제를 왜 풀지 못하냐면 이들은 여전히 능력주의, 성과주의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엘리트들의 오해보다 더 양보할 준비가 돼 있다.

“386부터 20대까지 능력주의, 성과주의, 물질주의를 겪고 있다. 동질성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고, 같이 새로운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박권일 세대간 갈등을 언론이 싸움 붙이듯 이야기한다, <한겨레> 역시. 세대간 갈등은 그리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 386부터 20대까지 능력주의, 성과주의, 물질주의를 겪고 있다. 동질성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고, 같이 새로운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김도훈 신뢰의 복원, 국가의 의지가 중요하다. 무조건 작은 정부가 아니라 강하고 능력 있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사회 합의. 특히 재벌 문제, 경제 문제는 사법이 제일 중요하다. 일벌백계해야 한다, 갑질하다 걸리면 죽는다는 게 증명돼야 한다. 인류 사회에서 한 걸음 나아갈지, 이대로 멈출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자들이 일상적 민주주의 가치를 만드는 주체가 될 것이다.

사회·정리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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