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가운데)이 광복군 동지인 장준하(오른쪽), 노능서(왼쪽)와 함께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20일 중국 산둥성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이른바 뉴라이트 쪽이 부딪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헌법 전문이다. 우리 헌법 첫 문장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하는 것은 헌법에 규정한 임시정부(1919년)의 법통을 부정하는 위헌적 주장이 되고 만다.
헌법 전문의 ‘임시정부’ 관련 문구는 헌법이 여러 번 개정되는 과정에서 들어갔다 빠졌다 했다. 1948년 제헌 헌법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돼 있었다. 문장이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을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전문은 이승만 정부와 4·19혁명으로 성립된 장면 정부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세력은 5차 개헌(1962년 12월) 때 헌법 전문에서 임시정부 문구를 아예 뺐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라며 3·1운동만 남긴 채 그 결과물인 임시정부를 삭제하고, 대신 5·16 이념을 넣었다.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헌법 전문은 이후 전두환 정권 때까지 이어졌다.
“임시정부 법통 계승”이라는 명확한 표현은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이뤄진 9차 개헌(1987년 10월) 때 들어갔다. 광복군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이었다. 개헌 논의가 한창이던 1987년 여름 어느 날 김준엽(1920~2011, 전 고려대 총장)은 자신의 연구실로 이종찬(81, 당시 민정당 의원)을 불렀다. 김준엽은 게이오대 유학 중 일본군에 징병됐다가 1944년 2월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던 학병 탈출 1호였다. 시위 학생을 제적하라는 정부의 압력에 맞서다 1985년 총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난 그는 “평생 관직을 맡지 않겠다”는 소신을 지켰다. 노태우 정권의 국무총리직 제의에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며 고사한 일은 유명하다. 이종찬은 한일합병 뒤 여섯 형제가 모두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우당 이회영(1867~1932)의 손자이다.
“김준엽 총장이 불러 갔더니 임시정부 법통 승계를 헌법 전문에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석에서 동의한 뒤 그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더 많은 의견을 구했다. 그래서 당시 이강훈(1903~2003) 광복회장을 만나 여쭸더니 그도 임시정부 대목을 꼭 넣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 뒤 헌법개정특위 위원인 허청일 민정당 의원을 먼저 만나 얘길 꺼냈더니 그는 공감하지 않았다. 이에 당시 민정당 간사였던 현경대 의원에게 임시정부 조항을 적시할 필요성을 설득했고, 그는 동의했다. 야당인 신민당도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뒤에는 순조롭게 진행됐다.”(이종찬 전 의원, 지난 2일 전화 인터뷰) 결국 광복군 김준엽과 독립투사의 후손 이종찬이 임시정부 법통을 살려냈다.
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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