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통해 “인권 탄압 받고 있다” 허위 주장 퍼뜨려
재판·탈당 거부, 지지층인 강경보수 결집으로 이어져
‘보수 총동원령’ 21일 태극기집회 7천여명 참가 예상
인권 업무 전문가 “유엔의 진정절차 이해 못하고 있다”
‘외로운 박근혜’ 헛발질, 사법부에 대한 이해 부족 지적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오는 16일 만기되는 박 전 대통령의 구속 만기의 연장 여부를 논의한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근혜식 정치 투쟁’이 시작됐다. 중형이 예상되자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이라며 재판 자체를 거부하더니, <시엔엔>(CNN) 등을 통해 “인권 탄압을 받고 있다”는 허위·왜곡 주장을 국제사회에 퍼뜨리며 정치적 박해를 받는 ‘양심수 코스프레’에 나섰다. 자유한국당의 자진 탈당 압박에는 ‘자신 있으면 나를 밟고 가보라’는 듯 특유의 냉기가 느껴진다. ‘배신의 정치’에 떠밀려 탈당하느니 제명당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은 유력 정치인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 중 ‘원칙과 신뢰’를 자신의 정치 브랜드로 삼았다. 뚝심 있는 정치적 결정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버티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대통령 재임 당시에는 여론이나 정치적 압박에 떠밀려 자신의 뜻과 다른 결정을 내리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런 버티기는 이념적으로 강경보수, 지역적으로 티케이(TK), 연령대로 60대 이상 노령층이라는 3대 핵심 지지층을 기반으로 하는 동시에, 이들의 정치적 요구를 겨냥한 것이었다.
재판 거부와 탈당 거부는 이런 박근혜식 정치에 익숙한 핵심 지지층의 결집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또 보수 노령층을 중심으로 ‘유엔’, ‘시엔엔’ 등 국제적 공신력을 빌린 허위 주장이 급속히 유포되고 있다. 불붙은 동정론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친박·보수 성향 단체들은 ‘총동원령'을 내리며 주말 대규모 대정부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토요일인 21일 도심 태극기집회는 7000여명 규모로 예상되는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대 규모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움직임은 자유한국당 출당 조처에 대한 당 안팎의 반발을 키우는 한편,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자유한국당의 정치적 선택지를 좁히는 요인이다. 문재인 정부 중반쯤 확정판결이 나올 경우, ‘국민통합’을 주장하는 보수층의 사면 요구 명분이 될 수 있다.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호소할 예정이라고 미국 CNN 방송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연합뉴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같은 일련의 상황이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이나 국외 단체들과 교류가 가능한 보수단체들의 ‘작품’일 것이란 관측이 많다. 16일 박 전 대통령의 ‘재판 보이콧’ 선언 직후부터 마치 사전에 짜인 시나리오처럼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법무팀의 ‘유엔 진정’도 사전에 기획된 여론전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엠에이치(MH)그룹이 냈다는 유엔 진정의 경우, 이미 같은 내용의 광고문이 엠에이치그룹 이름으로 지난달 27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바 있다. 국내에 광고비를 대는 누군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외국 변호사를 활용한 것만 다를 뿐, 지난 3월 국정농단 공범인 최순실씨를 대리하던 이경재 변호사가 “법무부와 검찰이 최씨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유엔 인권이사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이 그대로 이용됐다. 유엔 인권 관련 업무에 정통한 한 정부 관계자는 “엠에이치그룹이란 단체가 유엔의 진정 절차나 접수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진정서 원문도 국제법 기준으로 볼 때 조악하기 그지 없는 수준”이라며 “100% 언론플레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 진정서 번역본은 보수 단체인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와 극우 성향 인터넷사이트 ‘일간베스트’(일베)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반면 ‘조언 그룹’을 잃은 박 전 대통령이 1998년 정치 입문 이전의 ‘외로운 박근혜’ 상태로 돌아가며 헛발질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보수야당의 한 의원은 19일 “주변의 조언이 끊겼으니 제대로 된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상식’과는 다른 인식을 내비쳐온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구속 연장을 예상치 못했을 수도 있다.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유영하 변호사가 ‘의뢰인’인 박 전 대통령에게 현재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두 개의 판결” 발언 등 사법부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이나 이해 부족이 박 전 대통령의 최근 행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남일 홍석재 기자 namfic@hani.co.kr[관련 영상] <한겨레TV> 정치 논평 프로그램 | 더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