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 청와대 상춘재 들머리에서 평창겨울올림픽 폐막식 참석을 위한 미국 정부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보좌관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보좌관이 이끄는 미국 대표단이 23일 오후 방한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찬을 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등 북한 대표단도 이틀 뒤인 25일 방남할 예정이어서,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식(25일)이 개막식(9일)에 이어 다시 중요한 외교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평창올림픽 폐막식 외교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영향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평창올림픽 기간에 가장 눈길을 붙잡는 대목은 북-미 접촉 성사 여부다. 북한과 미국 대표단은 한국에 머무는 시기가 이틀(25~26일) 겹친다. 양국 대표단이 마음만 먹는다면 서울이나 평창 등 어디에서든 만나 향후 양국 간 본격 대화의 물꼬를 트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쪽은 김영철 부위원장 일행을 만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청와대도 이번엔 북-미 접촉을 중재할 뜻이 없다는 쪽이다.
다만,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담당관이 북한 대표단의 실무자들과 접촉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후커 담당관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한반도 문제를 담당해온 베테랑으로 최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방한에도 동행했다. 또 제임스 클래퍼 국가안보국(DNI) 국장이 2014년 11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선교사 케네스 배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해 당시 정찰총국장이던 김영철 부위원장과 면담할 때도 배석했다.
이번 올림픽 폐막식 계기에 유의미한 북-미 접촉이 불발한다 해도, 이후 남북과 미국 사이에 시도를 이어갈 여지는 열려 있다. 북한과 미국 모두 대화에 뜻이 있다는 점은 올림픽 개막식에서 확인됐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20일 ‘김여정-펜스 접촉’이 무산되긴 했어도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들이 모여 북-미 간 ‘예비적 대화’의 필요성에 의견 일치를 봤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온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지난 12일 남북관계 개선이 이어지는 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을 하지 않을 수 있음을 내비치는 등 대화 분위기 조성에 관심을 보인 바 있다.
문제는 북-미 사이에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강한 가운데, 예비 대화로 가기 위한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펜스 부통령은 22일(현지시각)에도 미 보수주의 연맹 연차총회에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에 대해 “지구상에서 가장 폭군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의 중심 기둥”이라고 비판했다. 북한도 23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 “그 어떤 제재도 도발도 위협도 우리의 핵보유국 지위를 절대로 허물 수 없다”며 완고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국이 북-미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되 대북 제재는 더 강화하겠다는 이른바 ‘동시적인 최대의 압박과 관여’ 기조에 북한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미지수다. 실제 미국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어렵게 남북 간 대화의 창이 열린 상황에서 다시 23일(현지시각) 북한 선박 56척과 해운·무역 업체들에 대한 제재 방안을 내놨다. 미국의 이번 대북제재 조처에 북한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된 대화 국면이 새달 18일 막을 내리는 평창패럴림픽을 앞뒤로 한두 달 안에 북-미 대화 쪽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한반도 긴장지수가 다시 올라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특히 연기됐던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패럴림픽 이후 시작될 경우 북한의 강력 반발로 ‘올림픽 평화’는 ‘잠시 찾아왔던 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정부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북-미 간 간극을 미리 좁히고 이견을 조율해 북-미가 마주 앉을 수 있도록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추진해야 하는 처지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북-미가 대화의 문턱을 높여놓아서 우리가 이견을 조율하고 중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들 문턱을 없애기 위한 한국의 외교력이 중요한데, 그 노력은 시차를 둔 남·북·미의 삼각 대화에서 시도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정부가 ‘평창 이후’를 시야에 넣고 김영철 부위원장과 충분히 대화하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보 가능한 이방카 보좌관에게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간접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노지원 기자,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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