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4일 사퇴 의사를 밝히고 당사를 떠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죄, 권력의 사유화에 침묵한 죄, 계파 이익 챙기느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은 죄, 집권여당에 제대로 싸우지도 대응하지도 대안 제시도 못한 죄, 막말과 품격 없는 행동으로 국민을 짜증 나게 한 죄, 반성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죄, 희망과 비전을 등한시한 죄 등등은 민심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에 충분한 죄목입니다.”
6월19일 ‘남덕우기념사업회’(회장 김광두)의 주관으로 서강대에서 열린 ‘대한민국의 보수: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살릴 것인가?’라는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출신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언급한 ‘자유한국당의 7가지 죄’다. 그 역시 원로로서 보수 몰락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그의 의견은 6·13 지방선거 참패 뒤 우왕좌왕하는 자유한국당이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강연이 끝난 뒤 다가가 물었다. “그럼 지금 자유한국당은 당장 뭘 해야 할까요?”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백번, 천번 무릎을 꿇는다고… 뭐, 스스로 청산해야지. 내려놓을 사람 내려놓고, 떠나갈 사람 떠나가고.” 이어 ‘국민에 대한 도리’를 말했다. “(보수 몰락의) 조짐은 4·13 총선(2016년)부터 있었는데 끝나고 나서 흐지부지, 탄핵 뒤에도 흐지부지, 대선 뒤에도 흐지부지…. 이게 안 망하고 버텨? 뒤늦게라도 이마를 맞대고 와이셔츠 바람으로 말이야, 정말 치열하게 고민해야 그게 국민에 대한 사죄지.”
하지만 6·13 지방선거 참패 뒤 자유한국당의 일주일은 김 전 의장의 말과 반대로 가는 모습이다. 패배 책임을 두고 ‘네 탓 공방’을 벌이고, 그동안 일시적으로 봉합된 계파 갈등도 수면 위로 올라오며 해묵은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자기희생 없는 ‘나 빼고 혁신’을 외친다는 비아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언제쯤 바닥을 칠 수 있을까.
자유한국당의 7가지 죄
6월18일 당 수습 방안을 발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에 들어오는 김성태 원내대표.
정당이 선거에서 참패한 뒤 취하는 ‘수습의 정석’이 있다. 당대표 사퇴→대국민 사과→의원총회 등을 통한 당내 토론→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구성(또는 조기 전당대회를 통한 당대표 선출)→혁신안(쇄신안) 발표→혁신안 실천. 이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국민에게 진정성을 느끼게 하려면, 김 전 의장의 말대로 기득권 내려놓기(특권 내려놓기·총선 불출마), 책임 가리기, 치열한 토론을 통한 성찰 등이 추가돼야 한다. 낡은 표현이지만 당의 근본을 바꾸자는 ‘정풍 운동’이 일어나면 정당의 체질 개선 속도와 크기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보수 지식인들 사이에선 자유한국당의 해산과 재창당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물론 그래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유한국당도 ‘매뉴얼’대로 움직이긴 했다. 지방선거 다음날인 6월14일 홍준표 당대표가 사퇴했다. 6월15일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은 김성태 원내대표의 주도로 의원총회(의총)가 열렸다. 김 원내대표는 “구태 청산과 기득권 해체 없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려는 보수로는 더는 설 자리가 없다. 한 줌도 안 되는 보수당 권력을 두고 아웅다웅하는 추한 모습을 더는 국민 앞에 보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총 뒤에는 참석자들이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며 국회 중앙홀에서 무릎을 꿇었다. 6선의 김무성 의원이 “차기 총선에 불출마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몇몇 의원도 이에 동참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주말(6월16~17일)에 당은 공식 일정도, 현안 논평도 없었다. 역대급 패배를 한 정당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평화로웠다. 6월18일 오전 11시 처음으로 당 수습 방안이 나왔다. 그리고 반성과 미래에 대한 논의 대신 갈등이 시작됐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쓰인 원내대표실 배경막 앞에서 김성태 원내대표는 “지금 이 순간부터 곧바로 중앙당 해체 작업에 돌입한다”며 당 수습 방안을 밝혔다. 외부 인사에게 전권을 준 혁신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당내 갈등 도화선 된 쇄신안
이는 미국의 원내 중심 정당을 염두에 둔 것으로 ‘리모델링’에 가깝다. 상원·하원 양원제인 미국은 당대표 없이 의원들의 대표인 원내대표가 당을 대표한다. 선거 공천을 총괄하고 ‘당대표→중앙당→시·도당→당협·지역위원장’으로 이뤄진 정당 조직을 관리하는 중앙당을 없애고 국회 중심의 정책 정당을 만들겠다는 게 김 원내대표의 구상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방안은 아니다. 홍준표 전 대표가 2011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도 추진했다가 무산된 방안이다.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이후 치러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참패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쇄신안으로 “중앙당사를 없애고 원내 정당화를 추진해보겠다”는 방안을 던졌지만 당내 반발로 무산됐다.
문제는 우리 정치사에서 수없이 쏟아진 당 혁신안이 언제나 창고 속에서 먼지만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이유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 혁신과 변화의 논의를 시작해도 “다음 총선 공천은 누가 하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순간 모든 쟁점이 ‘계파 갈등’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계파 갈등’이라는 블랙홀
6월20일 탈당 의사를 밝힌 서청원 의원 페이스북.
당내 갈등을 불러온 박성중 의원의 태블릿피시 메모.
2년 뒤 21대 총선의 공천을 좌우할 당권을 누가 가질 것이냐는 프레임에서 김 원내대표의 수습 방안은 당내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동안 비교적 침묵을 지키던 ‘친박’(친박근혜) 의원들과 일부 중진 의원들이 들고일어섰다. 정우택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성태 원내대표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한 사안이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당 수습 방안을 낸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고 김 원내대표를 겨냥했다. 한선교 의원은 “김성태를 중심으로 한 어떤 세력이 결집해 있는 것은 아닌가. 이 기회가 비주류에서 주류로의 전환 계기가 아닌가. 이런 염려스러운 걱정도 한다”며 김 원내대표의 수습 방안을 당권 싸움, 계파 갈등 프레임으로 끌어들였다.
6월19일 한 태블릿피시의 메모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초선 모임에 참석한 박성중 의원의 메모가 사진기자의 렌즈에 포착됐다. 메모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앙당 슬림화-원내정당화 2. 혁신 비대위-명망 인사 3. 당 해체→전 당원 비난 *김성태 4. 친박, 비박 싸움 격화 5. 탈당파 비판 6. 중도적 의견파-존재 7. 친박 핵심 모인다→서청원, 이완구, 김진태 등등 박명재, 정종섭 8. 세력화가 필요하다→적으로 본다/목을 친다!”
박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뒤 바른정당에 합류했다가 복당한 인사로 홍준표-김성태 체제에서 홍보본부장을 지냈다. 친박 의원들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이었다. 김 원내대표의 수습 방안이 결국 자신들의 ‘목을 치는’ 시나리오라고 간주했다. 박 의원이 6월20일 기자들에게 “(바른정당에서 돌아온) 복당파 의원 10여 명이 6월19일 아침 7시30분부터 9시까지 조찬 모임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나온 어떤 의원의 발언을 요약한 것이다”라고 해명했지만 불길을 잡지 못했다. 게다가 조찬 모임 자리에는 김 원내대표도 있었다. 이날 친박계 좌장인 8선의 서청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탈당을 선언했다. 그가 의원들에게 보낸 글은 ‘메모 파문’으로 빛이 바랬다.
“자유한국당이 다시 ‘불신의 회오리’에 빠졌습니다. 아직도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친이’ ‘친박’의 분쟁이 끝없이 반복되며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비극적 도돌이표’입니다.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고자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친박-비박 갈등만 키운 의총
6월19일 자유한국당 대회의실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초선 의원 모임.
6월21일 의원총회에 참석한 김성태 원내대표.
당이 갈피를 못 잡을 때 요구되는 게 바로 ‘여의도 때’가 덜 묻은 초·재선 의원의 목소리다. 초선 의원 41명 가운데 30여 명이 6월19일, 21일 세 차례 모였다. “그동안 초선들이 당 개혁이나 혁신에 침묵하고 뒤로 빠져 있던 점에 대해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김성원 의원)고 반성문도 쓰고, 당 쇄신 방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냉소에 부딪혔다. 정종섭 의원 등 초선 의원들 대부분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천한 ‘진박’(진실한 박근혜계)으로 친박을 자처하며 당선된 이들이라,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냐는 비아냥이 터져나왔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와 홍준표 대표 시절에도 침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들도 입을 닫았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라는 구절을 떠올리자 아무도 돌을 던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6월21일 당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로 한 의총은 자유한국당의 현재를 그대로 드러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의총은 점심 식사도 건너뛰고 진행됐다. 오후 3시께 식사 대신 빵이 의총장으로 들어간 뒤 의원들이 하나둘 의총장을 나왔다. 그들의 입에선 당 쇄신이나 성찰 대신 “김성태 사퇴 요구가 나왔다” “박성중 메모에 대한 질타가 많았다”는 말이 나왔다. 5시간 넘게 ‘친박-비박(또는 비복당파-바른정당 복당파)’의 감정싸움만 있었다는 얘기다. 오후 3시20분 김 원내대표가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링 위에 올라 흠씬 두들겨맞고 내려온 권투선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당이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쇄신과 개혁을 통해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아무 결론을 못 내렸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다음날인 6월22일 김 원내대표는 출근길에 기자들에게 “친박의 망령이 되살아난 거 같아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말 지긋지긋한 친박의 망령”이라며 “조만간 혁신 비대위 구성 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려 한다”고 수습 방안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문제는 자유한국당의 일주일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당내에서 새 리더십을 창출한 동력이 없고, 결국 구심점 없이 친박-비박의 ‘생존 욕망’만 충돌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친박 망령’ 발언에 김진태·한선교 의원 등 친박 의원들은 “정치세력으로서 친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계파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김 원내대표”라며 김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는 등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당직자들 사이에선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자신들 특권은 안 내려놓고 번번이 우리만 희생하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유한국당이 선거 패배 뒤 결정한 사안은 딱 한 가지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국회 앞 여의도동 중앙당사를 임대료가 저렴한 당산동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천막 당사’ 추억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까.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