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핵심 측근이자 <전두환 회고록> 집필자인 민정기 전 공보 비서관이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를 사탄, 거짓말쟁이라고 쓴 것은 전 대통령이 아닌 바로 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전두환은 지난해 4월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헬기사격 사실을 증언한 조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 광주지법에서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는 재판을 하루 앞둔 26일 민 전 비서관의 이름으로 입장문을 내고 “(남편은) 2013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지금까지 의료진이 처방한 약을 복용해 오고 있다”며 재판 불출석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민 전 비서관은 28일 아침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조 신부를 가리켜서 사탄, 거짓말쟁이라고 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워딩이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아니다. 확실히 기억은 없는데 막판에 내가 마지막 작업할 때 그런 표현을 쓴 것 같다”고 주장했다.
회고록 작성 과정에 대해서 민 전 비서관은 “전 대통령은 2000년부터 구술 녹취도 하는 등 회고록 준비를 2000년부터 했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났던 2013년께 스스로도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무렵 나를 찾아와 초고는 됐으니까 책임지고 맡아서 완성하라, 전적으로 일임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 뒤 자신이 책임지고 원고를 완성했으며 퇴고 과정에서도 전두환이 전혀 개입을 안 했다는 것이다.
이에 진행자가 “국민들은 전 전 대통령이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국민을 속인 게 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자 민 전 비서관은 “모든 회고록이 저자가 직접 쓴 회고록이 얼마나 되겠냐”며 “(표현을 직접 쓰진 않았지만) 전 대통령도 조 신부의 말이 허위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자 명예 훼손의 피고가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말에는 “내가 피고가 될지 내가 고발당할지 알 수가 없지만 그거는(내가 쓴 것은) 분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5년 36회 대구공고 총동문회 체육대회에 참석한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모습. 유튜브 갈무리.
전두환의 측근인 민 전 비서관은 전두환의 현재 상태에 대해 “나를 알아보고 평소와 같이 말을 해도 나중에 얘기하면 왔다는 사실뿐 아니라 누가 왔었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을 못 한다”며 “재판에 나가서 말하는 내용들이 전혀 진실성 있게 사실과 부합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알츠하이머가 발병했다는 2013년 이후에도 2015년 10월 대구공고 체육대회 참석, 2016년 20대 총선 투표 등 외부 활동을 해왔고 비교적 최근인 지난해 신년회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이에 알츠하이머 발병 자체에 대한 의심의 시선이 가시지 않고 있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에서는 민 전 비서관의 이런 주장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5·18단체 법률 대리인인 김정호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민 전 비서관이 회고록에 상당 부분 관여했다는 주장에 대해 “재판을 지연시키고 전두환 책임을 물타기하려는 꼼수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민 전 비서관은 회고록 관련 민사 소송에서도 자신이 집필에 상당 부분 관여했다고 주장해왔다”며 “자신에 대한 추가 고발을 유도함으로써 전두환 재판을 6개월~1년까지 지연시키려는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시기적으로도 다분히 의도적”이라며 민 전 비서관의 주장이 마치 이제야 나오는 ‘폭탄 발언’인 것처럼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
김 변호사는 민 전 비서관의 실제 역할과 권한에 대해 “법률적으로 전두환의 사자(심부름꾼)에 불과하다”며 “민 전 비서관은 전두환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전두환의 기본 의도나 주장은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부수적으로 문구 수정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거짓말쟁이와 같은 새로운 표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민 전 비서관은 지난 5월에도 같은 라디오에 출연해 “오히려 무장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기관총을 많이 쐈다”고 말하는가 하면, 북한군 개입 주장과 ‘광주사태’ 표현을 굽히지 않아 비판을 샀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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