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19일 오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평양공동선언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정부가 ‘4·27 판문점선언’ 비준을 위한 국회 동의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후속 합의인 ‘9월 평양공동선언’(평양선언)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군사합의서’(군사합의서)를 먼저 비준해, 보수 야당이 반발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두 합의문이 국민 재정 부담 및 국가 안보 사항이라 헌법이 규정한 ‘국회 동의’를 받지 않은 건 위헌이라는 입장이다.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고, 법원에는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겠다고 했다. 청와대는 “남북간 합의서는 헌법이 아니라 남북관계발전법을 적용받으며, 이 법에 따르면 평양선언과 군사합의서는 국회 동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1. 남북합의는 국가간 ‘조약’인가
자유한국당은 이양수 원내대변인은 23일 논평을 내어 “평양공동선언은 남북 철도·도로 착공 등 국민의 세금 부담 사항이 담겨있고, 남북군사합의서는 국군의 정찰·감시기능 축소 등 국가 안위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헌법에 따라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헌법 60조1항>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
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
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반면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에게 “헌법에서 말하는 조약은 ‘국가’ 간 합의를 말한다. 우리 헌법상 북한은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북한과 맺은 합의는 조약이 아니어서 헌법이 적용될 수 없다”며 “북한은 남북관계발전법(2005년 제정)의 적용을 받는다”고 했다.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3조>
①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이다.
②남한과 북한간의 거래는 국가간의 거래가 아닌 민족내부의 거래로 본다.
김 대변인은 “남북 합의서는 한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를 바탕으로 한 당국 간 합의로 보아 헌법상 조약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북합의서 비준에 대해 헌법 60조를 근거로 위헌이라고 하는 건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양수 원내대변인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북한이 유엔에 가입할 때도 가입 대상국이 되느냐 마느냐 논란이 있었다”면서 “북한이 헌법에서 인정하는 국가가 아니더라도 국가간 협상에 준하는 합의이므로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원내대변인은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를 반대하는 이유도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 정책을 행정부에 일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헌법에서 안보나 재정 부담 등 국가의 중요 사안을 행정부에 일괄 위임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국회 동의’ 절차를 둔 만큼 평양공동선언(재정 부담)과 군사합의서(안보 사항)도 헌법 취지에 따라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발전법에서 국회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재정부담’과 ‘입법사항’ 두 가지다. 정부는 평양선언은 비준동의 절차를 밟고 있는 판문점선언 후속이라 ‘별도의’ 동의절차가 필요없고, 군사합의서는 재정부담이나 입법사항이 아니므로 국회 동의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21조3항>
③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남북합의서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남북합의서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송영무 국방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은 지난 9월 19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각각 서명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2. 남북합의는 ‘정치적 합의’…한계 극복하려 입법
김 대변인은 또 남북은 국가 관계가 아니라는 대법원 판례를 들며 헌법 60조 ‘국회동의’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고 했다. 대법원은 1998년 ‘남북 교류협력 합의서’의 법적 성격에 대해 판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남북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임을 전제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해야 할 공동의 정치적 책무를 지는 남북한 당국이
특수관계인 남북관계에 관하여 채택한 합의문서로서, 남북한 당국이 각기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상호간에 그 성의 있는 이행을 약속한 것이기는 하나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이를 국가 간의 조약 또는 이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98두14525)
이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남북간 각종 합의가 법적 제도로 뒷받침되는 게 필요했다. 정부는 남북관계발전법이 제정되기 전에도 헌법에 근거해 국회 동의를 추진했다. 2000년 6·15선언 이후 4대 남북경협합의서의 법적 기속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회에 체결 동의안을 제출했고 2003년 국회에서 통과됐다. 4대 남북경협합의서의 실무합의서 성격인 9개 추가합의서도 2004년 국회 동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각종 남북 합의에 대한 법적 지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법제처가 2008년 낸 법제자료(‘남북관계발전법에 따른 남북합의서의 발효절차 사례연구 및 개선방안 고찰)를 보면, “당시 남북합의서 체결동의안은 국회 동의 후 관보에도 ‘조약’ 형식이 아닌 ‘남북간의 합의서’ 형식을 취했다. 헌법 60조1항에 따라 조약으로서 국회 동의를 구했으나, 남북의 특수관계에 입각해 조약과는 구별되는 처리절차를 거쳤다는 것이고 이는 남북간 특수관계를 고려해 합의서 처리에 관한 별도 절차를 규정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반증”이라고 했다.
국회는 2005년 남북간 합의의 ‘법적 성격’을 부여하는 남북관계발전법을 제정했다. 이제 북한과 합의서는 국제법상 ‘조약’이냐 단순한 ‘신사협정’이냐 여부를 따질 필요 없이 대통령이 체결·비준하도록 했다. 국회 동의가 필요한 합의서냐 아니냐 여부만 판단하면 되도록 했다.
3. 법제처는 입장을 바꿨나
남북 정상간 합의문에 대한 법제처의 해석도 논란이 된다. 법제처는 2007년 10·4선언은 “국회 동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가, 2018년 4월 판문점선언은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고 이번 평양공동선언은 “국회 동의가 필요없다”고 한 것이다. 이를 두고 보수진영에서는 현 법제처장의 경력을 거론하며 문재인 대통령의 입맛에 맞춘다는 주장을 한다.
법제처는 오로지 ‘남북관계발전법 21조에 따라 국회 동의 대상이냐 아니냐를 판단했다고 한다. 법제처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판문점선언이나 평양공동선언의 문구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다. 판문점선언 당시 통일부가 제출한 자료에서 재정부담 비용이 포함돼있었다. 그래서 국회 동의 대상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평양공동선언은 판문점선언 후속 성격이므로 판문점선언 국회 동의 절차를 밟는 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가 안 된 상태에서 두 후속 합의서를 비준하는 건 선후 관계가 뒤바뀐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이 관계자는 “판문점선언 통과를 위해 노력한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법제처 설명을 정리하면, 정부가 비준한 평양선언 내용 가운데 판문점선언과 겹치지 않는 내용은 추진할 수 있고, 판문점선언과 겹치는 부분은 국회동의를 기다렸다가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군사합의서는 ‘막대한 재정 부담’이나 ‘입법사항’이 아니므로 바로 이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법제처 법제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7년 법제처가 10·4선언은 국회 동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할 당시 “10·4선언이 국가나 국민에 대한 재정부담의 여부, 규모 및 방법을 확정할 수 없고, 입법사항의 여부도 확정하기 어렵다”고 근거를 밝혔다. 정부도 이에 따라 국회 동의 절차 없이 관보 게재 절차를 밟았다. 법제처는 그해 10·4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총리회담 합의서 등 3개 합의서에 대해서는 “사업 내용이 확정적이고 통일부가 소요재원 2200억원을 반영해 국회 심의 의뢰 중이었으므로 남북관계발전법 21조3항에 따른 ‘중대한 재정적 부담’에 해당한다”며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했지만,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