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지역구 얘기를 안 하려고 합니다. 근데 또 어떡해요. 지역구에 제가 표를 얻었으니 지역구 얘기도 좀 하나 해야 하는데, 이거는 지금 미래에 꼭 필요한 중소기업 연수원, 천안에만 짓지 말고 전북에도 꼭 주셔야 할 거로 믿는데… 장관님, 기재부 장관님! 답변해주십시오.”
8일 밤 9시45분께 경제부처 예산 심사가 한창인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 전북 전주을이 지역구인 정운천 바른미래당 의원이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연수원 건설을 기획재정부가 반대하는데 “꼭 찬성 좀 해달라”는 요구였다. 김 부총리는 “이런 건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담당하는 게 기재부”라며 난색을 보였지만 정 의원의 압박은 마이크가 꺼진 뒤에도 계속됐다.
내년 예산안 심사가 한창인 가운데 11일 <한겨레>가 지난 7·8일 열린 국회 예결특위 경제부처 심사 발언을 분석해보니, 299명의 국회의원을 ‘대표하는’ 50명의 예결특위 위원이 자신의 지역구 민원에 집중하는 행태는 여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예결특위 위원들은 그동안 “예결특위 위원들이 자신의 지역구 예산 증액에만 몰두한다”는 지적을 의식한 듯, 늦은 밤 질의를 활용해 지역구 민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늦은 시각의 질의는 언론의 주목을 덜 받는다.
지난 7일 11시간30분쯤 진행된 심사를 보면, 오전과 오후에 지역구 민원을 제기한 의원은 총 3명에 불과했다. 오전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 주거시설 등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고, 오후엔 조배숙 민주평화당 의원이 새만금국제공항 건설 필요성을 강조했다. 새만금은 전북 군산에 있지만, 조 의원 지역구인 바로 옆 익산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이날 회의는 식사를 위해 저녁 7시16분에 정회됐다.
저녁 8시40분 회의가 재개되자 지역구 민원이 물밀듯 쏟아졌다. 첫 순서인 박덕흠 자유한국당 의원(충북 보은·옥천·영동·괴산)부터 바로 시작이었다. 첫마디가 “충북선 철도 고속화사업 예비타당성(예타)조사 면제 필요성에 대해 질의하겠다”였다. 밤 10시가 넘자 지역구 민원은 더 빈번해졌다.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역구의 ‘영주댐 정상화’ 관련 질의를 했고,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신분당선 호매실 구간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상대로 촉구했다. 오전 10시3분부터 시작된 질의는 이튿날인 8일 새벽 1시33분까지 진행됐다. 낮 시간대 정부 공격에 목소리를 높였던 이은재 자유한국당 의원도 새벽 1시10분께 지역구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현대자동차가 추진 중인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민원에 나섰다. 이날 집중된 17건의 지역 민원 중 13건이 저녁 시간 이후에 이뤄졌다.
한국당 정책위의장을 맡은 함진규 의원(경기 시흥)은 이날 밤 10시32분부터 시작된 7분의 질의 시간 전부를 지역구 민원에 할애하기도 했다. “(시흥) 하중역사 관련 설계비 14억원이 필요한데, 이것 좀 넣어주실 수 있냐”는 함 의원의 노골적인 요구에 김현미 장관은 “기재부랑 상의해보겠다”고 답했다. 김현미 장관은 이날 밤 가장 자주 이름이 불렸다. 건설과 관련된 지역 민원이 많기 때문이다. 함 의원은 이튿날 새벽 1시30분께 마지막 질의자로 나섰는데, 이때도 김 장관을 상대로 지역구 민원 해결을 촉구하는 ‘끈질긴 모습’을 보였다.
기재부 관료 출신인 송언석 자유한국당 의원(경북 김천)은 낮 시간대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는 등 ‘거시경제’ 질의에 집중했지만 저녁이 되자 지역구 민원을 내놓아 눈총을 샀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장과 2차관을 지내 ‘예산통’으로 꼽히는 송 의원은 그동안 예결특위에서 한국당 ‘대표선수’로 정부 정책을 질타해왔다. 그러나 이날 저녁엔 “김천과 문경 철도 구간에 ‘미싱구간’이 생기는데 연결해야 한다”며 김동연 부총리를 압박했다. 기재부에서 송 의원의 ‘직속 선배’였던 김 부총리는 “송 의원님, (기재부) 예산실 계실 때 기준으로 좀 봐주시지요”라며 ‘하소연’했지만, 송 의원은 “그건 적절한 답변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경제부처 심사 마지막 날인 8일엔 지역구 질의가 23건으로 늘었고, 절반가량인 10건이 저녁 이후에 나왔다. 경제부처 심사 내내 지역구 예산을 한번도 언급하지 않은 한 의원은 “우리 지역구에도 돈이 필요하지만, 예결특위에선 국가 예산 전체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역구 예산을 그런 식으로 들이미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예결특위는 12일까지 비경제부처 심사를 마무리한 뒤 15일부터 소위 심사를 시작한다.
이런 ‘민원 야시장’은 청와대를 상대로 한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열렸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전북 군산)는 운영위 국감이 열린 지난 6일 밤 10시30분 장하성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을 향해 군산에 내국인 카지노를 포함한 ‘새만금복합리조트’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하게 촉구했다. 운영위 관계자는 “의원들이 낮에는 청와대 질타에 집중했지만 밤 시간대에는 지역구 민원을 부탁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꼬집었다. 송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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