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여사(왼쪽)와 박열 의사. 박열기념관 제공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과 남편 박열 의사의 항일투쟁을 옹호했던 일본인 여성혁명가 가네코 후미코(박문자) 여사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일본인 여성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건 처음이다. 국가보훈처는 17일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가네코 여사를 포함해 128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추서할 계획이라고 15일 밝혔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가네코 여사는 불우한 가족사로 인해 충북 부강면에 살던 고모부의 양녀로 자랐다. 1919년 3·1 만세운동의 열기를 몸소 겪고 일본 외가로 돌아갔다 1922년 박 의사와 동지이자 연인으로 만났다. 무정부주의 혁명가로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 탄압정책의 뿌리인 ‘히로히토 천황 체제’에 저항했다.
가네코 여사는 1923년 히로히토 부자를 암살하려던 박 의사와 함께 폭탄 반입을 모의한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옥중에서 박 의사와 혼약을 맺은 그는 1926년 2월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판에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출두해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박문자”라고 말했다. 3월26일 최종 공판에서 박 의사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자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1925년 도쿄 형무소에서 일왕과 왕세자 암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을 당시 찍힌 두 사람의 모습. 박열기념관 제공
옥에 갇혀 조사를 받을 무렵, 두 사람이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이 유포됐다. 재판부가 유리한 진술을 얻기 위해 두 사람에게 환심을 쓴 것으로 알려지자 정치권에서 사법권 문란이라며 내각총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를 둘러싼 묘사가 2016년 영화 <박열>에서 재연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가네코 여사는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4개월 뒤인 7월23일, 23살의 나이로 옥중에서 숨졌다. 당시 일제는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으나, 지금까지도 의혹이 남아 있다. 가네코 여사는 옥중에서 지나온 삶의 기억을 담담히 기록했다. 훗날 그의 친구들이 원고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책에는 일제의 폭압에 시달리던 조선인의 비참한 삶에 대한 연민과 3·1 만세운동을 지켜본 감격의 기억 등이 담겨 있다.
가네코 여사는 박 의사의 고향인 경북 문경읍 팔영리에 묻혔으나 2003년 마성면에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이장됐다. 훗날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힌 박 의사는 1990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박 의사의 변론을 맡았던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일제의 토지 강탈에 맞선 조선인들을 지원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으로선 처음으로 독립유공자가 됐다.
이번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이들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안맥결 여사도 포함돼 있다. 안 여사는 1919년 10월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됐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만삭의 몸으로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견뎠지만 독립유공자 조건인 ‘옥고 3개월’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한 지 13년 만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됐다. 전북 전주 기전여학교 재학 중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최애경, 최금수, 김순실, 정복수 선생도 독립유공자로 추서된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서 광복군 활동을 지원한 홍매영 여사도 공로를 인정받았다. 홍 여사의 남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 등을 지낸 차이석 선생이다.
유강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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