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격랑에 온 나라가 요동쳤다. 그 격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남겼는가?
두 개의 공정성이 부딪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조국’의 공정성이 문제시됐다. 공정성에도 종류가 있다. 법정에선 합법성이, 정치에선 정당성이, 사회에선 도덕성이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여권은 사태 초기부터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었다. 도덕성의 상처가 정당성을 침식하는 상황에서 불법이 아니라고만 맞섰으니 말이다.
두 개의 공정성
평등, 정의, 공정의 가치를 주창해온 그가, 실은 너무 많이 가졌고 그것이 자녀들의 성공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웠고, 허망했고, 실망하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판관은 법정에 있지 않았다. 국민의 마음에 있었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단어 하나만 가운데 두고 한국 사회의 불평등, 불공정, 부정의를 논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지금 그에게 돌을 던지며 정의와 공정을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함께 물어야 했다. 오랜 세월 불법과 불공정, 특권과 반칙을 일삼아왔던 자들이 돌연 성스럽고 준엄한 심판자의 위치에 올라서서 면죄부를 챙기고 있었다.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가 12일 오후 검찰 개혁과 조국 법무부 장관 수호를 주장하며 검찰청사가 있는 서울 서초역 사거리에서 `제9차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를 열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 광경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시민들은 ‘공정성 요구의 공정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권력과 부의 묵은 부패 고리들을 우리 사회가 이만큼 가혹하게 파헤치고 책임을 물은 적이 있는가? 말하자면 지금, 우리 사회의 진정 중대한 공정성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상이한 인식이 있었고, 양자는 각기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시민의 좌절, 탄핵국면의 종결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년 동안 80%에 이르는 시민들이 대통령을 지지해준 밑바탕에는 헌법적 가치와 법치주의를 훼손한 박근혜 정권을 시민항쟁으로 종식시키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드는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낙관과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국 정국’을 거치면서 점점 많은 지지층이 더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그런 신뢰와 확신이야말로 정치의 동력이요, 지지자 한 명이 주변의 열 명을 설득하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조국이라는 개인의 흠결 자체가 지지층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 같진 않다. 진짜 문제는 전 정권을 탄핵하며 등장했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현 정권이 더 높은 도덕적 잣대로 단호하게 문제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현 정권은 탄핵과 촛불이 상징하는 비범한 카리스마의 광채를 상실하고 ‘평범’해졌다. 더불어 그 광채 안에서 함께 빛나고 있다고 느껴온 많은 지지자가 방향을 잃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에서 그를 찍은 42%의 두 배나 되는 시민의 지지를 받았다. 오랫동안 20%대에 머물던 민주당의 정당 지지율도 현 정권 들어 50% 가깝게 올라섰다. 그 빛나던 시간이 종결됐다. 물론 잔광이 희미하게나마 우리 주변을 비추고 있다. 그 빛의 시간을 되찾으려면 다수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광화문 대 서초동, 시민정치의 보편화
80 대 20의 탄핵 국면이 해체되면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광화문 대 서초동’ 구도의 대규모 집회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세 대결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백만 시민의 집회는 언제나 ‘정권 대 국민’의 구도였다. 집단행동 참여자가 반드시 다수 여론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대규모 집회는 압도적 다수 여론을 반영하거나 여론을 주도했다. 지금 상황은 다르다. ‘국민 대 국민’의 대결 양상이다.
이것은 해방 직후 찬탁-반탁 대결로 회귀한 게 아니다. 그 반대다. 21세기 정치 현상이다. 광화문 집회는 2000년대 시민정치의 행동양식이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어 보편화되었음을 뜻한다. 군복과 선글라스는 유튜브와 카카오톡의 세계에 섞여든 구시대의 잔여물일 뿐이다. 여기엔 양면성이 있다.
우선 이런 변화는 어떤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제 제도정치의 권력 엘리트들이 시민들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정치를 좌우하는 게 힘들어졌다. 어느 정권이든 반대파 시민들의 저항행동을 두려워하고, 그들과 소통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나경원 원내대표 등 지도부와 참석자들이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의 헌정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광화문 규탄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한편으로 여기에는 우려할 만한 이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행동하는 적극적 집단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면서 정치와 여론의 연결을 왜곡할 수 있고, 각 세력이 저마다 ‘국민’의 자격을 독점하려 하면서 정치적 반대자를 비국민으로 폄훼하고 혐오하는 경향이 생겨날 수 있다.
중요한 건 이제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누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잘’ 참여하느냐가 문제다. 반대자를 동등한 국민으로 존중하고 제도정치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각자의 요구를 표출하는 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두 동강’ 아닌 복합적 갈등 상황
정치권의 공방이 집회 규모로 경쟁하는 세 대결 양상으로 번지면서 한국 사회가 조국 문제로 두 동강 난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졌다. 하지만 ‘광화문 대 서초동’이라는 집단행동의 대치가 곧 사회 전반의 여론과 이해관계 지형을 반영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한국 사회는 단순한 일차원적 균열이 아니라 복잡하고 유동적인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광화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유한국당 같은 보수 정치세력, 과격 우익 세력,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부정 세력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수가 분명히 있었다. ‘조국 사퇴’를 바라고 문재인 대통령에 실망한 사람들이다. 서초동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 사람, 검찰과 보수 야당에 분노한 사람, 조국을 지키고 싶은 사람. 펼쳐보면 이렇게 다채롭다.
집회에 나오지 않은 절대다수의 사람들까지 시야를 넓히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노동복지정책, 외교안보와 대북정책 등 국가적 의제들에 대한 누적된 이견들이 사회 전반에 침전돼 있다. 이처럼 여러 결의 쟁점에서 불신과 적대가 얽혀서, 문자 그대로 칡덩굴과 등나무가 뒤엉킨 듯한 갈등(葛藤) 상황이다.
그 덩굴을 풀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광화문을 찾은 고령층 시민들이 무엇에 그토록 분노했는지, 조국 장관 임명이 옳지 않다고 대답한 60%의 시민들이 무엇에 실망했는지, ‘조국도 싫고 자유한국당은 더 싫다’는 청년층이 바라는 정치는 무엇인지를 집권세력은 깊이 성찰해야 한다.
통합과 포용의 정치가 답이다
상처가 깊다. 다들 많이 지쳤다. 증오와 분노의 열병, 불신과 냉소의 냉병이 위험 수위에 다가가고 있다.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가 절실하다.
치유와 변화는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서초동에서만 ‘국민’을 보지 말고, 광화문을 가득 메운 국민의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 초반에 큰 박수를 받았던 통합의 정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다’는 그 정치가 다시 돌아왔으면 한다. 집권당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말이다.
통치의 위력과 능력은 다른 것이다. 위력은 반대를 뚫고 뜻을 관철하는 것이지만, 능력은 반대자를 협력자로 만들어 함께 뜻을 세우고 구현하는 것이다. 진정한 포용의 정치는 ‘포용국가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고 미워하는 국민의 목소리까지 경청하고 설득하려는 인내에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잘할 수 있으리라 나는 낙관한다. 우리는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