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3화 잡스와 애플
제3화 잡스와 애플
디지털 모바일 세상이 오늘날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데 스티브 잡스라는 한 기업가의 역할도 결정적이었다. 잡스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컴퓨터를 공동창업해 2011년 56살로 숨지기까지, 정보산업 분야를 넘어서는 화제를 몰고 다닌 뉴스인물이었다. 아이폰과 맥북 등을 쓰지 않는 이들도 잡스가 만들어낸 혁신과 장벽 파괴의 수혜자라는 점에서는 애플 사용자와 매한가지다. 1988년 창간 이후 <한겨레> 아카이브에 스티브 잡스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돌아보면 한 기업인과 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킨 궤적을 만날 수 있다. 아이폰이 우연히 모바일 혁명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거대한 기성시스템에 도전해온 시도 덕분이었음을 알게 된다. 해설 구본권
매킨토시 깃발 2007년 아이폰 출시로 세상은 ‘스마트폰 혁명’을 경험했지만, 앞서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 혁명’이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로 깃발을 들었다. 1984년 애플이 출시한 매킨토시컴퓨터(맥)는 훗날 대세가 된 개인용 컴퓨터를 실질적으로 열어젖힌 제품이다. 1984년 당시 매킨토시 광고는 달리던 젊은 여성이 해머를 던져, 빅브러더가 지배하는 ‘1984’의 세상을 파괴하는 메시지로 충격을 안겼다. 1994년 창간한 <한겨레21>은 마침 탄생 10돌을 맞은 매킨토시를 본격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매킨토시는 16비트 중앙연산장치에 마우스와 그래픽 운영체제,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 글자 모양과 크기를 바꿀 수 있는 비트맵 화면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개인용 컴퓨터였다. 매킨토시는 ‘대중을 위한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아이비엠의 컴퓨터언어 전문가와 프로그래머들만 다루던 계산기계 ‘컴퓨터’는 마우스와 ‘그래픽 사용자 환경’(GUI)을 채택해 누구나 자신만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가 되었다. 잡스의 마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매킨토시 컴퓨터를 연인인 듯 끌어안은 채 만족해하는 사용자의 표정을 곽윤섭 기자가 2002년 4월 생생하게 담아냈다. 1984년 출시된 매킨토시의 형태를 유지한 1991년 매킨토시 클래식Ⅱ 모델이다. 화면도 작고 흑백이지만, 도스(DOS) 아닌 그래픽 사용자 환경 운영체제의 우아함을 보여준다.)
1991년 1월23일 서울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코엑스)에서 열린 매킨토시컴퓨터 전시회가 당시 분위기를 전해준다. 매킨토시컴퓨터 설명회엔 방학을 맞아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진지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설명을 듣고 있는 순간을 이정우 기자가 포착했다. 사진 속 형형한 눈빛들은 훗날 정보화 세상을 어떻게 맞았을지 궁금하다.
1991년 1월23일 코엑스 전시회의 또다른 부스에서는 매킨토시컴퓨터를 이용한 출판편집 시연이 진행됐다. 잡스는 범용 ‘개인용 컴퓨터’로 매킨토시를 개발했지만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가장 활발하게 맥을 사용한 곳은 출판, 편집, 디자인 분야였다. 코딩 방식의 컴퓨터(IBM 호환기종) 식자 출력이 대세일 때 ‘위지위그’(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방식의 매킨토시 출현은 출판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다. 디자이너에게 맥은 대체불가 도구가 됐다. 이정우 기자가 촬영했지만 지면엔 소개되지 않은 사진이다.
해머 든 젊은 여성 광고로 화제
그러나 잡스는 85년 애플서 해고 1997년 애플로 다시 복귀하여
아이팟으로 음악 감상 기준점 만들고
아이폰이라는 마법의 세계로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시기에 개발된 ‘매킨토시2’의 모습이 당시의 애플을 말해준다. 잡스 해고 이후 프로젝트가 진행돼 1987년 출시된 매킨토시2의 모습이다. <한겨레>는 1994년 11월6일치 신문에 매킨토시2의 기사와 사진을 실었다. “IBM 호환PC-매킨토시 장벽 무너진다”는 기사는 소프트웨어 설치를 통해 아이비엠 피시와 매킨토시에서 각각 상대 운영체제를 구현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다. 당시 대세였던 아이비엠 호환 기종처럼 컴퓨터 본체를 수평으로 눕히고 그 위에 모니터를 얹은 매킨토시2다. 매킨토시2의 모니터에는 맥 오에스(OS)가 아닌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가 구현된 모습이다. 잡스 없던 시기, 애플의 상태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여겨진다.
1994년 매킨토시2/ 1994년 당시 지면엔 흑백 사진이 실렸지만, 한겨레 필름 서가에서 지면에 쓰지 않은 B컷을 찾아냈다. 지면 게재 사진보다 사용자의 얼굴이 덜 드러난 각도여서 탈락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취재한 김종수 기자가 작고한 탓에 확인할 길이 없다. 김 기자가 남긴 필름은 컬러였다
아이비엠과 손을 잡다 잡스가 쫓겨난 이후 애플은 달라졌다. 잡스가 해머를 날려 부숴버리려던 빅브러더와 좀비의 세상은 아이비엠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잡스가 없던 시기 애플은 아이비엠과 손을 잡고 파워피시를 내놓는다. 아이비엠은 한때의 애플의 적이었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인텔이 지배하는 ‘윈텔’(Win+tel)에 맞서기 위한 애플과 한 팀이 됐다. 1995년 <한겨레21>에 실린 2면짜리 파워피시 광고는 당시 ‘애플+아이비엠’의 파트너십을 보여준다.
1995년 <한겨레21>에 실린 파워피시 지면 광고.
씨네21의 잡스 인터뷰 1998년 11월17일치 한겨레의 영상주간지 <씨네21>은 픽사 회장이던 스티브 잡스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접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다. 국내 언론이 잡스를 인터뷰한 일대 사건이었지만, 당시 잡스는 신작 영화를 외국 언론에도 적극 홍보해야 하는 신생 영화제작사의 회장이었을 따름이다. 잡스를 대면 인터뷰하는 행운은 김봉석 <씨네21> 기자의 몫이었다. <벅스 라이프> 세계 첫 시사회 자리였다.
<벅스 라이프> 세계 첫 시사/픽사 회장 스티브 잡스 인터뷰) 영화제작자 스티브 잡스의 훗날 이력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씨네21>은 아마도 좀더 적극적인 편집을 했거나 표지인물로 썼을 것이다. <씨네21>을 퇴사하고 대중문화평론가가 된 김봉석 작가는 팩트스토리에 "당시 한국의 10여개 매체 기자들이 함께 픽사를 방문했다"며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잡스와 한국 기자들이 문답을 주고받았던 장면이 잘 기억난다"고 말했다.
아이맥 조선호텔 발표회. 잡스 복귀 이후 애플은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아이맥 등을 출시하며, 애플 신화를 재건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2000년 8월30일 애플 신제품 발표회가 열렸다. 서정민 기자가 찍었다.
미니멀리즘과 아이팟 잡스는 모든 제품에서 나사와 구멍 하나를 더 없애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제품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더 많은 조작 버튼을 채택한 기업들과 반대다. 아이폰은 갈수록 디자인이 단순해졌고 베젤이 사라지더니 나중엔 화면의 유일한 홈 버튼마저 자취를 감췄다. 경쟁사들도 물리적 조작부를 최소화하는 디자인 모방에 나섰다. 매끄러운 미니멀리즘의 아름다움은 사용자를 팬으로 만들었다. 잡스는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사용경험을 위해 하드웨어에 머무르지 않았다.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하드웨어의 연결이 뇌와 신체의 작동처럼 분리할 수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기를 꿈꾸었다. 아이폰을 내놓기에 앞서서 잡스는 음악으로 실험적 시도를 했고, 사용자를 매혹시켰다. 이용자들은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음악 청취 방식을 경험했다. 음악 감상은 오래된 문화적 행위였는데, 잡스는 당연하게 수용되어온 방식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은 세계 최초로 엠피(MP)3 플레이어를 개발하고, 아이리버·코원 등 국내 제품은 세계 시장을 주도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후발주자인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으면서 달라졌다. 가격과 하드웨어 완성도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디자인을 통한 궁극적 사용경험과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라는 점이 아이팟의 특징이었다. 2003년 한 사무실의 아이팟 사용자들 모습을 류우종 기자가 취재했다.
스티브 잡스와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던 빌 게이츠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1998년 6월18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방한해 기자회견하는 모습을 박승화 기자가 취재했다. 스티브 잡스도 1983년 11월 애플컴퓨터 회장으로 한국을 찾은 일이 있다. 28살이던 스티브 잡스와 73살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컴퓨터 기술을 논의했다. 당시 이 회장은 잡스를 만난 뒤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간의 극장’ 해설자이기도 한 김태권 작가가 만들어 2016년 1월16일치 <한겨레>에 게재한 스티브 잡스 클레이아트다. 잡스 자신은 개발자가 아니었지만 스티브 워즈니악, 조너선 아이브 등 뭇 천재들을 통해서 자신의 꿈을 이뤄낸 인물이다.
2009년 1월14일 <한겨레21>의 인기 코너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에 실린 스티브 잡스 일러스트. 김중화 작가가 맥북에서 <토이스토리>의 캐릭터들이 나오는 장면을 표현했다. 잡스는 “창의성은 점을 연결하는 일(connecting dots)”이라고 강조했다. 창의성은 없던 무엇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다르게 바라보고 새롭게 연결하는 행위라는 의미다.
스티브 잡스는 가을에 숨졌지만 겨울까지 추모 열기가 이어졌다. 2012년 2월2일 강원도 태백산도립공원에는 잡스의 눈 조각이 세워졌다. 한 관광객이 잡스의 눈 조각에 입맞춤하는 모습을 김경호 기자가 찍었다.
스마트폰 생태계의 표준을 만들다 아이폰을 통해서 잡스의 마법이 다시 한번 진행됐다. 두번째 마법은 훨씬 광범하고 강력했다. 매끄러운 터치로 작동하는 화면과 더불어 앱스토어와 애플리케이션 형태의 소프트웨어 사용 방식은 새로웠지만, 오래지 않아 스마트폰 생태계의 표준이 됐다. 국내 출시 몇달 만에 아이폰은 한국 통신 환경의 민낯을 드러내며 거스를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스티브 잡스는 오늘날 모두의 일상이 된 ‘모바일 시대’를 선물했지만, 그가 남긴 것은 무엇보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라는 말이었다. 잡스가 숨진 이튿날 <한겨레>의 기사는 “다르게 생각하라”는 잡스의 유산이 세상을 바꿨다고 보도했다.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동시대인의 삶의 방식을 바꿔내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혁신가로 기록될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기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4년 맥컴퓨터를 선보일 때 내보낸 광고에선 한 여인이 해머를 들고 뛰어가 빅브러더가 지배하는 남성들의 세상을 박살내버리는 모습을 담았다. 아이비엠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배하는 기존의 세상을 부수겠다는 메시지였다. 피시 시장에서 엠에스의 지배를 뒤집지는 못했으나, 스마트폰과 태블릿피시를 앞세운 포스트피시 전략으로 그의 꿈은 이뤄졌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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