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10화 노회찬
노동운동 하며 엘리트의식 벗어
“불판 갈자” 통쾌한 비유 퍼뜨리며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 첫 입성
떡값 검사 명단 공개로 고초
검찰의 기소로 결국 의원직 상실
경기고 동문들은 왜 그를 욕했을까
제10화 노회찬
노동운동 하며 엘리트의식 벗어
“불판 갈자” 통쾌한 비유 퍼뜨리며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 첫 입성
떡값 검사 명단 공개로 고초
검찰의 기소로 결국 의원직 상실
경기고 동문들은 왜 그를 욕했을까
노회찬은 2005년 8월18일에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한다. 이종찬 기자가 찍었지만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는 어떤 시대를 살았나. 노동자 김지선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1978년에 노회찬은 군복무를 하던 삼수생이었다. 그해 2월에 동일방직 사건이 있었다. 회사와 한편을 먹은 남성 노동자들이 똥을 퍼 왔다. 고무장갑을 끼고 민주노조를 요구하던 여성 노동자들한테 똥을 발랐다. 항의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해고당했다. 노동자의 언론도 노동자의 정당도 없던 때였다. 이 사건을 보도해주는 매체가 없었다. 해설 김태권
김지선은 1970~80년대 노동운동의 산증인이다. 훗날 여성운동가로도 활약한다. 2002년 6월 <한겨레21>에는 활동가 김지선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하종강에 따르면 “그가 한 일들은 우리나라 현대 노동운동사를 단면으로 자른 듯 보여준다”. 촬영은 박승화 기자. 김지선은 1988년에 연하의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결혼했다.
노동자 김지선 “‘노동자가 된 계기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김지선씨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먹고살기 힘들어서’라고 짧게 답했다.” 하종강은 질책받는 기분이었다고 썼다. 김지선은 학생운동권 출신이 아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동일방직 사건에 대해 이 땅의 언론이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자” 참지 못해 연단에 뛰어올랐다. “김지선씨는 그때 처음 구속되어 6개월을 살았다.” 감옥에서 나온 후 김지선은 노동운동을 했다. 나중에 여성운동을 했다.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과 서울여성의전화 부회장 등을 지냈다”고 2013년 <한겨레> 기사에 실렸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 김지선은 한 사람을 만났다. 학생운동을 하던 이 사람은 노동운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진짜 노동자가 됐다. 용접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도 땄다. 김지선은 연하의 이 사람과 1988년에 결혼을 했다. 이 사람이 바로 노회찬이다. 김지선과 노회찬은 평생의 동지였다. 그런데 2002년 하종강의 글에 남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2013년에 김지선을 소개하는 <한겨레> 기사의 제목은 “남편의 대리인 아니다”였다. 당당한 운동가 김지선을 굳이 ‘노회찬의 아내’로 부르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이 글이 돌아 돌아 시작하는 이유기도 하다.
2013년 보궐선거 때 노원에 출마한 김지선을 노회찬이 돕고 있다. 지면에는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신소영 기자가 찍었다.
<한겨레신문> 1989년 12월26일치 11면에 노회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민중민주계열 활동가들을 “미군축출과 민족해방혁명을 의식화했다”는 혐의로 잡아갔다는 내용을 보며, 저때 공안당국이 얼마나 ‘엿장수 마음대로’였는지 실감한다. 기사에 등장하는 차명진의 이름도 눈길을 끈다.
그가 가지 않은 길 운동권 경력이 있으면 보수정당에 들어갈 때 몸값이 올랐다. 이재오는 그때 대통령이던 김영삼한테 영입되어 훗날 이명박의 측근이 된다. 신지호는 이명박계 국회의원이었다. 장기표는 2020년에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다. 김문수와 차명진은 이제 가십난에만 나온다. “386 운동권 출신의 이른바 명망가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젊은 날 이상과는 큰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노선도 판이한 보수정당을 선택했다. 물론 이런 선택은 진보정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 1월에 이미 이런 기사가 <한겨레>에 실렸다. 노회찬과 다른 길이었다. 웃음을 잃지 않던 모습 때문에 우리는 노회찬이 언제나 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그가 가지 않은 길을 살펴보면 이 점은 더욱 눈에 띈다. “<한겨레신문> 1월1일자에는 20, 30대의 상당수가 진보이념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노회찬의 1995년 인터뷰다. “좋아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69.9%, “새로운 진보이념정당이 나타나면 지지하겠다”가 64.6%로 나온 여론조사를 언급했다. “실제 선거에서 투표 행위를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 요구는 큰 것 같습니다. 진보세력이 그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보정당세력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을 탓할 것이 아니라, 진보세력 스스로가 자신의 행적을 뒤돌아보며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회찬은 <한겨레신문> 1995년 1월1일치에 실린 여론조사를 주의 깊게 읽었다. 20, 30대 10명 중 7명이 한국 사회에 변화가 필요하며 진보이념정당이 나타나면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응답자 대부분이 지금 40대에서 60대 초반 사이의 시민일 터다.
1999년 9월, <한겨레21>에 실린 젊은 노회찬의 모습.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중심 정당이라는 슬로 건답게 노동운동 인사가 많다”는 설명이 붙었다.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말솜씨의 비결? 노회찬 말솜씨의 비결은 무얼까. 그의 말은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어법이다. 상황을 압축하는 은유와 비유가 뛰어나다. ‘불필요하게 엄숙한 말은 금물이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노회찬식 화술의 철학”이라고, 2006년 5월 <한겨레21>은 분석한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말솜씨가 아니다. 노회찬은 1993년부터 10년 동안 <매일노동뉴스>를 발행했다. 1997년에는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을 썼다. “노동조합운동책의 지은이로 유명한 그가 이번에는 대중적인 역사책 쓰기에 나선 셈이다.” 그때 <한겨레>에 실린 서평이다.
노동자의 언론도 노동자의 정당도 없던 때를 살아온 노회찬. 1993년에 <매일노동뉴스>를 창간한다. 함께 일한 사람들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자신의 프로필 3개 안에 꼭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넣을 만큼 <매일노동뉴스>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고 증언한다. 1998년 5월 <한겨레21>에 노회찬과 매일노동뉴스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
진보정당의 약진과 노회찬의 당선은 1인2표제 실시 덕분이었다. 이 제도의 물꼬를 튼 사람 역시 노회찬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노회찬과 당원들이 “선관위가 1인2표제 홍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이다. 김경호 기자가 찍었다. 민주노동당은 그때 기호 12번이었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라고 촉구하는 권영길과 노회찬의 모습이다. 2001년 7월에 강창광 기자가 찍었다.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찾아 공개한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은 열명의 당선자를 낸다. 개표방송을 보던 노회찬(옆얼굴), 이수호, 천영세, 단병호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이 사진을 다시 보며 나는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난다. 이종근 기자가 찍었으나 지면에 나가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찾아 공개한다.
첫 당선 직후 기쁘게 웃는 노회찬의 모습이다. 꽃다발을 들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도 평소의 유머 감각이 엿보인다. 2004년에 김종수 기자가 찍은 사진을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검찰과 삼성 즐거운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노당의 한달, 행복하십니까”. 2004년 7월, <한겨레21> 기사의 제목이다. 거대 양당은 진보정당을 따돌렸다. “민노당이 교섭단체 중심인 국회에서 철저히 왕따당하면서 유력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이라던 기대는 점차 물거품이 되고 있다.” 이듬해 5월의 기사 제목은 이랬다. “민주노동당은 왜 폭락했나”. 노회찬은 진작부터 위기를 내다보고 쓴소리를 했다. “민노당이 뭘 했는데 잘못된 게 아니고 뭘 안 해서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다. (…) 새 방법을 개발하고 실천해야 하는데, 기존에 정해진 코스에만 갇혀 있다. 만민공동회 등 참여민주주의에 맞는 새로운 정치 영역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없고 운동권이 하던 아스팔트 위와 기왕의 보수정치꾼들이 하는 의회만 왔다갔다 한다. 집과 학교를 왔다갔다 하듯 딱 두곳만 왔다갔다 한다.” 2005년의 일침이 지금도 아프다. 민주노동당이 이후 밟게 된 운명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노회찬은 2005년 8월18일에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한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검찰은 두고두고 노회찬을 괴롭힌다. “허익범 특검팀이 노 의원을 첫 타깃으로 겨냥한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법조계에서 나온다.” 2018년 7월, <한겨레21>에 실린 분석이다. 드루킹 사건의 특검팀 상당수가 “노 의원을 껄끄러워했던 검찰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종찬 기자가 찍었지만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황교안과 경기고 이 대목에서 낯익은 사람이 또 한명 등장한다. 그때 검찰 수사를 지휘하던 황교안이다. 황교안과 노회찬이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1989년에 노회찬이 잡혀갔을 때 황교안과 만난 일화도 2016년 한겨레티브이를 통해 알려졌다. “다른 검사에게서 조사를 받은 노동운동가 노회찬을 ‘황교안 검사’는 자기 방으로 불렀다. 포승줄 풀어주고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함께 마셨다고 한다. “어떻게 지내냐”는 ‘황 검사’의 물음에 “서울구치소 새로 옮겨가서 덜 춥고 괜찮다”고 답하니 “그게 문제다. 구치소 지을 때 이렇게 따뜻하면 안 된다고 했었다”는 게 ‘황 검사’의 반응이었다.”
2017년 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황교안이 노회찬에게 깜짝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이정우 기자가 찍었다. 노회찬의 놀라는 표정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황교안에게 노회찬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른 신념을 가진 옛친구였을까, 아니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엘리트 집단을 배신한 이단아였을까?
2016년 8월, 세월호 유족과 노회찬이 함께한 모습을 이정우 기자가 찍었다. 사진 설명은 이렇다. “정의당이 23일 오후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연 ‘세월호 특조위 활동보장, 백남기 농민 청문회 시행 결의대회’에서 노회찬 원내대표가 규탄사를 하는 동안 세월호 유족이 눈가를 훔치고 있다.”
2016년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노회찬의 모습이다. 2018년 7월 노회찬이 세상을 떠난 뒤 <한겨레21>은 “진보정당사에 남긴 노회찬의 족적, 그리고 노무현과 닮은점”이라는 채진원의 글을 실었다.
‘삼성 엑스(X)파일’ 공개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을, 2014년 3월에 인터뷰잡지 <나들>이 만났다. “10년 전 ‘불판 교체론’으로 ‘전국구 이빨’의 명성을 얻었던 노회찬 전 의원과 삼겹살 불판을 사이에 두고 음주 인터뷰를 했다. 심각한 주제일수록 ‘빵’ 터뜨리는 그의 차진 입심도, 진보정치의 가치와 전략에 대한 신념도 여전했다.” 박승화 기자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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