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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유머의 정치인’ 노회찬의 외로웠던 싸움

등록 2020-07-19 16:59수정 2020-08-02 17:16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10화 노회찬

노동운동 하며 엘리트의식 벗어
“불판 갈자” 통쾌한 비유 퍼뜨리며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 첫 입성

떡값 검사 명단 공개로 고초
검찰의 기소로 결국 의원직 상실
경기고 동문들은 왜 그를 욕했을까

노회찬은 2005년 8월18일에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한다. 이종찬 기자가 찍었지만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노회찬은 2005년 8월18일에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한다. 이종찬 기자가 찍었지만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는 어떤 시대를 살았나. 노동자 김지선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1978년에 노회찬은 군복무를 하던 삼수생이었다. 그해 2월에 동일방직 사건이 있었다. 회사와 한편을 먹은 남성 노동자들이 똥을 퍼 왔다. 고무장갑을 끼고 민주노조를 요구하던 여성 노동자들한테 똥을 발랐다. 항의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해고당했다. 노동자의 언론도 노동자의 정당도 없던 때였다. 이 사건을 보도해주는 매체가 없었다. 해설 김태권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이 나섰다. 3월26일은 부활절이었다. 여의도 예배가 <기독교방송>(CBS) 라디오로 생중계되는 날이었다. “‘갑시다!’ 그 한마디에 여섯명의 노동자들은 용수철처럼 일어나 연단으로 올라갔다. 목사님을 왼쪽으로 밀치면서 CBS 글자가 새겨진 마이크를 움켜잡았다. (…)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퍼진 시간은 30초 정도였을 것이다.” 2002년 <한겨레21>에 쓴 하종강의 글이다. 김지선은 이날 연단에 뛰어오른 노동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김지선은 1970~80년대 노동운동의 산증인이다. 훗날 여성운동가로도 활약한다. 2002년 6월 &lt;한겨레21&gt;에는 활동가 김지선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하종강에 따르면 “그가 한 일들은 우리나라 현대 노동운동사를 단면으로 자른 듯 보여준다”. 촬영은 박승화 기자. 김지선은 1988년에 연하의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결혼했다.
김지선은 1970~80년대 노동운동의 산증인이다. 훗날 여성운동가로도 활약한다. 2002년 6월 <한겨레21>에는 활동가 김지선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하종강에 따르면 “그가 한 일들은 우리나라 현대 노동운동사를 단면으로 자른 듯 보여준다”. 촬영은 박승화 기자. 김지선은 1988년에 연하의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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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김지선

“‘노동자가 된 계기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김지선씨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먹고살기 힘들어서’라고 짧게 답했다.” 하종강은 질책받는 기분이었다고 썼다. 김지선은 학생운동권 출신이 아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동일방직 사건에 대해 이 땅의 언론이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자” 참지 못해 연단에 뛰어올랐다. “김지선씨는 그때 처음 구속되어 6개월을 살았다.” 감옥에서 나온 후 김지선은 노동운동을 했다. 나중에 여성운동을 했다.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과 서울여성의전화 부회장 등을 지냈다”고 2013년 <한겨레> 기사에 실렸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 김지선은 한 사람을 만났다. 학생운동을 하던 이 사람은 노동운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진짜 노동자가 됐다. 용접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도 땄다. 김지선은 연하의 이 사람과 1988년에 결혼을 했다. 이 사람이 바로 노회찬이다. 김지선과 노회찬은 평생의 동지였다. 그런데 2002년 하종강의 글에 남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2013년에 김지선을 소개하는 <한겨레> 기사의 제목은 “남편의 대리인 아니다”였다. 당당한 운동가 김지선을 굳이 ‘노회찬의 아내’로 부르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이 글이 돌아 돌아 시작하는 이유기도 하다.

2013년 보궐선거 때 노원에 출마한 김지선을 노회찬이 돕고 있다. 지면에는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신소영 기자가 찍었다.
2013년 보궐선거 때 노원에 출마한 김지선을 노회찬이 돕고 있다. 지면에는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신소영 기자가 찍었다.

신혼은 짧았다. 신랑 노회찬은 결혼한 지 1년 만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갔다. “치안본부 대공3부는 25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노련) 사건과 관련해 권우철(31) 노회찬(33)씨 등 2명을 이적단체 가입 등 혐의로, 차명진(31)씨를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1989년 12월26일치 <한겨레> 기사다. 노회찬의 이름이 처음 신문에 실렸다.

&lt;한겨레신문&gt; 1989년 12월26일치 11면에 노회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민중민주계열 활동가들을 “미군축출과 민족해방혁명을 의식화했다”는 혐의로 잡아갔다는 내용을 보며, 저때 공안당국이 얼마나 ‘엿장수 마음대로’였는지 실감한다. 기사에 등장하는 차명진의 이름도 눈길을 끈다.
<한겨레신문> 1989년 12월26일치 11면에 노회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민중민주계열 활동가들을 “미군축출과 민족해방혁명을 의식화했다”는 혐의로 잡아갔다는 내용을 보며, 저때 공안당국이 얼마나 ‘엿장수 마음대로’였는지 실감한다. 기사에 등장하는 차명진의 이름도 눈길을 끈다.

옛날 기사에는 잡혀간 사람의 출신 대학이 이름과 나란히 적혀 있었다. 학생운동이 주목받던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기사를 인용하며 그 부분을 지웠다. 명문고니 명문대 따위 내세우는 일은 노회찬이 가지 않은 길이라 그렇다. “노회찬은 엘리트의 특권의식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동현장에서 몸부림쳤다”고 채진원은 2018년 <한겨레21>에 썼다. 어느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밝혔다. “학생운동 당시 엘리트 의식 같은 게 있었는데 실제 노동현장에 가서 많은 충격을 받고 바뀌었다.”

1989년 기사에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같은 일로 잡혀간 사람이 누군가. 차명진이다. 진보정당 운동에 함께하던 사람 중에는 신지호가 있다. 진보정당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199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중당에 모여들었는데, 이때 민중당 지도부가 이재오와 김문수와 장기표다.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민중당은 해산했다. 지도부는 흩어졌다.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추슬러 진보정당을 만들어가는 일은, 그 무렵 감옥에서 막 출소한 노회찬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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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지 않은 길

운동권 경력이 있으면 보수정당에 들어갈 때 몸값이 올랐다. 이재오는 그때 대통령이던 김영삼한테 영입되어 훗날 이명박의 측근이 된다. 신지호는 이명박계 국회의원이었다. 장기표는 2020년에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다. 김문수와 차명진은 이제 가십난에만 나온다. “386 운동권 출신의 이른바 명망가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젊은 날 이상과는 큰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노선도 판이한 보수정당을 선택했다. 물론 이런 선택은 진보정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 1월에 이미 이런 기사가 <한겨레>에 실렸다. 노회찬과 다른 길이었다. 웃음을 잃지 않던 모습 때문에 우리는 노회찬이 언제나 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그가 가지 않은 길을 살펴보면 이 점은 더욱 눈에 띈다.

“<한겨레신문> 1월1일자에는 20, 30대의 상당수가 진보이념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노회찬의 1995년 인터뷰다. “좋아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69.9%, “새로운 진보이념정당이 나타나면 지지하겠다”가 64.6%로 나온 여론조사를 언급했다. “실제 선거에서 투표 행위를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 요구는 큰 것 같습니다. 진보세력이 그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보정당세력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을 탓할 것이 아니라, 진보세력 스스로가 자신의 행적을 뒤돌아보며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회찬은 &lt;한겨레신문&gt; 1995년 1월1일치에 실린 여론조사를 주의 깊게 읽었다. 20, 30대 10명 중 7명이 한국 사회에 변화가 필요하며 진보이념정당이 나타나면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응답자 대부분이 지금 40대에서 60대 초반 사이의 시민일 터다.
노회찬은 <한겨레신문> 1995년 1월1일치에 실린 여론조사를 주의 깊게 읽었다. 20, 30대 10명 중 7명이 한국 사회에 변화가 필요하며 진보이념정당이 나타나면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응답자 대부분이 지금 40대에서 60대 초반 사이의 시민일 터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훗날 노회찬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 있더라도 타지 않겠다, 타임머신을 타고 싶은 유혹이 있어도 유혹을 끊고 앞일을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강상구는 이 말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노동운동, 진보정당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 겪어봤으면서. 본인 말대로 ‘추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씨앗을 뿌리려는’ 일일지도 모르는데.”(<한겨레> 2019년 10월3일치)

1999년 9월, &lt;한겨레21&gt;에 실린 젊은 노회찬의 모습.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중심 정당이라는 슬로 건답게 노동운동 인사가 많다”는 설명이 붙었다.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1999년 9월, <한겨레21>에 실린 젊은 노회찬의 모습.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중심 정당이라는 슬로 건답게 노동운동 인사가 많다”는 설명이 붙었다.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2004년에 기회가 왔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티브이 토론이 열렸다. 마침 유권자들의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던 선거였다. “50년 묵은 정치 이제는 갈아엎어야 합니다. 50년 쓰던 고기판에 삼겹살 구우면 새까매집니다. 이젠 삼겹살 판을 갈아야 합니다.” 노회찬의 말이 화제가 됐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의 입담이 네티즌 사이에서 ‘촌철살인의 유머’라는 평과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티브이 토론에서) 했던 그의 발언이 ‘토론 어록’ 형태로 각종 인터넷 게시판으로 급속히 퍼지고 있는 것이다.”(3월24일치 기사) “각종 방송 토론에서 거침없고 해학과 기지 넘치는 발언으로 기성 정치권을 질타했던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이번 총선의 최대 ‘스타’로 꼽힌다.”(4월15일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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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솜씨의 비결?

노회찬 말솜씨의 비결은 무얼까. 그의 말은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어법이다. 상황을 압축하는 은유와 비유가 뛰어나다. ‘불필요하게 엄숙한 말은 금물이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노회찬식 화술의 철학”이라고, 2006년 5월 <한겨레21>은 분석한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말솜씨가 아니다. 노회찬은 1993년부터 10년 동안 <매일노동뉴스>를 발행했다. 1997년에는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을 썼다. “노동조합운동책의 지은이로 유명한 그가 이번에는 대중적인 역사책 쓰기에 나선 셈이다.” 그때 <한겨레>에 실린 서평이다.

노동자의 언론도 노동자의 정당도 없던 때를 살아온 노회찬. 1993년에 &lt;매일노동뉴스&gt;를 창간한다. 함께 일한 사람들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자신의 프로필 3개 안에 꼭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넣을 만큼 &lt;매일노동뉴스&gt;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고 증언한다. 1998년 5월 &lt;한겨레21&gt;에 노회찬과 매일노동뉴스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
노동자의 언론도 노동자의 정당도 없던 때를 살아온 노회찬. 1993년에 <매일노동뉴스>를 창간한다. 함께 일한 사람들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자신의 프로필 3개 안에 꼭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넣을 만큼 <매일노동뉴스>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고 증언한다. 1998년 5월 <한겨레21>에 노회찬과 매일노동뉴스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

진보정당의 약진과 노회찬의 당선은 1인2표제 실시 덕분이었다. 이 제도의 물꼬를 튼 사람 역시 노회찬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노회찬과 당원들이 “선관위가 1인2표제 홍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이다. 김경호 기자가 찍었다. 민주노동당은 그때 기호 12번이었다.
진보정당의 약진과 노회찬의 당선은 1인2표제 실시 덕분이었다. 이 제도의 물꼬를 튼 사람 역시 노회찬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노회찬과 당원들이 “선관위가 1인2표제 홍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이다. 김경호 기자가 찍었다. 민주노동당은 그때 기호 12번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2004년 총선날, 개표 방송을 보려고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당사가 좁아 국회 앞 사거리에 대형 화면을 설치하고, 빔프로젝터를 쏴 방송을 봤다. 개표 막판까지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던 노회찬이 당선됐을 땐 흥분 그 자체였다. 당원은 물론, 직장을 마치고 늦게 합류한 지지자들까지 국회 앞 한 맥줏집을 ‘점령’한 채 밤새 기뻐했다.” 2010년 2월 <한겨레21>의 기사다. 비례대표 마지막 한 자리에 그가 붙고 김종필이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정계은퇴시킨 주역이 됐다”는 말도 나왔다.(2004년 4월21일치) 아무려나 진보정당이 “두자릿수 의석을 차지하며 제3당이 된 데는 노회찬의 공이 컸다는 데 토를 다는 이가 거의 없다.”(4월17일치 기사)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라고 촉구하는 권영길과 노회찬의 모습이다. 2001년 7월에 강창광 기자가 찍었다.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찾아 공개한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라고 촉구하는 권영길과 노회찬의 모습이다. 2001년 7월에 강창광 기자가 찍었다.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찾아 공개한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은 열명의 당선자를 낸다. 개표방송을 보던 노회찬(옆얼굴), 이수호, 천영세, 단병호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이 사진을 다시 보며 나는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난다. 이종근 기자가 찍었으나 지면에 나가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찾아 공개한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은 열명의 당선자를 낸다. 개표방송을 보던 노회찬(옆얼굴), 이수호, 천영세, 단병호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이 사진을 다시 보며 나는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난다. 이종근 기자가 찍었으나 지면에 나가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찾아 공개한다.

첫 당선 직후 기쁘게 웃는 노회찬의 모습이다. 꽃다발을 들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도 평소의 유머 감각이 엿보인다. 2004년에 김종수 기자가 찍은 사진을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첫 당선 직후 기쁘게 웃는 노회찬의 모습이다. 꽃다발을 들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도 평소의 유머 감각이 엿보인다. 2004년에 김종수 기자가 찍은 사진을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어떤 사람은 “2004년 선거부터 1인 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의석이 늘었을 뿐, 진보정당 약진은 과장된 평가”라고 박하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 역시 노회찬이 한 일이다. “2000년 2월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하면서 기존 비례대표 의원 선출 방식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기존 방식은 별도의 정당투표를 하지 않고 지역구 출마자의 득표를 합산해 비례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역구 후보에게 던진 표를 통한 간접투표이므로 ‘직접’투표라는 헌법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2018년 7월 <한겨레21>에 실린 채진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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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삼성

즐거운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노당의 한달, 행복하십니까”. 2004년 7월, <한겨레21> 기사의 제목이다. 거대 양당은 진보정당을 따돌렸다. “민노당이 교섭단체 중심인 국회에서 철저히 왕따당하면서 유력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이라던 기대는 점차 물거품이 되고 있다.” 이듬해 5월의 기사 제목은 이랬다. “민주노동당은 왜 폭락했나”. 노회찬은 진작부터 위기를 내다보고 쓴소리를 했다. “민노당이 뭘 했는데 잘못된 게 아니고 뭘 안 해서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다. (…) 새 방법을 개발하고 실천해야 하는데, 기존에 정해진 코스에만 갇혀 있다. 만민공동회 등 참여민주주의에 맞는 새로운 정치 영역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없고 운동권이 하던 아스팔트 위와 기왕의 보수정치꾼들이 하는 의회만 왔다갔다 한다. 집과 학교를 왔다갔다 하듯 딱 두곳만 왔다갔다 한다.” 2005년의 일침이 지금도 아프다. 민주노동당이 이후 밟게 된 운명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노회찬은 2005년 8월18일에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한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검찰은 두고두고 노회찬을 괴롭힌다. “허익범 특검팀이 노 의원을 첫 타깃으로 겨냥한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법조계에서 나온다.” 2018년 7월, &lt;한겨레21&gt;에 실린 분석이다. 드루킹 사건의 특검팀 상당수가 “노 의원을 껄끄러워했던 검찰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종찬 기자가 찍었지만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노회찬은 2005년 8월18일에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한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검찰은 두고두고 노회찬을 괴롭힌다. “허익범 특검팀이 노 의원을 첫 타깃으로 겨냥한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법조계에서 나온다.” 2018년 7월, <한겨레21>에 실린 분석이다. 드루킹 사건의 특검팀 상당수가 “노 의원을 껄끄러워했던 검찰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종찬 기자가 찍었지만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노회찬은 검찰과 삼성이라는 가장 힘이 센 두 집단도 적으로 돌렸다. 삼성에서 꼬박꼬박 뇌물을 받아 챙긴 검사들의 명단을 2005년 8월18일에 노회찬이 공개한 것이다. “노회찬의 폭로가 있기 전까지 삼성 돈을 정기적으로 받은 인사들의 실명은 언론에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 언론사도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떡값 검사’는 이니셜로 보도하는 것조차 꺼렸다. 누군지 알면서도 보도 못 하는 기자들의 답답함은 한여름 무더위만큼이나 짜증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 의원의 이날 질의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한겨레21>이 2018년 7월에 회고한 내용이다.

그날 한겨레는 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떡값 검사 실명공개 파장/ 검찰 후폭풍 거셀듯”. 한겨레가 잘못 짚었다. 후폭풍은 거세지 않았다. 검찰은 여론 따위 신경 쓰는 조직이 아니었다. 뻔뻔한 사람을 보면 보통은 화가 난다. 그런데 뻔뻔함이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보는 사람이 두려움을 느낀다. 검찰과 삼성이 그랬다. “검찰은 한술 더 떠 2년 뒤인 2007년 5월에 노 의원을 기소했다. 치졸한 보복을 한 것이다. (…) 그는 무려 6년 동안 형사재판에 시달렸다.” 2심에서 무죄가 나왔으나 2013년에 유죄로 뒤집혔다. 노회찬은 의원직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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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과 경기고

이 대목에서 낯익은 사람이 또 한명 등장한다. 그때 검찰 수사를 지휘하던 황교안이다. 황교안과 노회찬이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1989년에 노회찬이 잡혀갔을 때 황교안과 만난 일화도 2016년 한겨레티브이를 통해 알려졌다. “다른 검사에게서 조사를 받은 노동운동가 노회찬을 ‘황교안 검사’는 자기 방으로 불렀다. 포승줄 풀어주고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함께 마셨다고 한다. “어떻게 지내냐”는 ‘황 검사’의 물음에 “서울구치소 새로 옮겨가서 덜 춥고 괜찮다”고 답하니 “그게 문제다. 구치소 지을 때 이렇게 따뜻하면 안 된다고 했었다”는 게 ‘황 검사’의 반응이었다.”

2017년 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황교안이 노회찬에게 깜짝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이정우 기자가 찍었다. 노회찬의 놀라는 표정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황교안에게 노회찬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른 신념을 가진 옛친구였을까, 아니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엘리트 집단을 배신한 이단아였을까?
2017년 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황교안이 노회찬에게 깜짝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이정우 기자가 찍었다. 노회찬의 놀라는 표정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황교안에게 노회찬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른 신념을 가진 옛친구였을까, 아니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엘리트 집단을 배신한 이단아였을까?

이 일화를 보고 황교안의 사람 됨됨이를 욕하기도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아마 황교안은 옛 친구 노회찬을 챙겨줄 요량으로 방에 불렀을 것이다. 그때 공안검사는 사람을 죽이고 살릴 위력을 가진 자리였다. 군사정권 시절 권력 말단의 사람들이 ‘공안검사의 동기동창’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는 황교안 나름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2007년에 남몰래 노회찬에게 정치후원금을 보냈다가 훗날 장관 청문회 때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노회찬을 바라보는 황교안의 시선에는 나름의 애틋함이 없지 않다. 물론 “구치소가 따뜻하면 안 된다”는 말을 노회찬 앞에서 한다거나 “10만원을 후원한 뒤 9만원의 소득공제를 받았다”거나 따위의 일에서 황교안이 어떤 사람인지 언뜻언뜻 드러나 보이지만 말이다.

2016년 8월, 세월호 유족과 노회찬이 함께한 모습을 이정우 기자가 찍었다. 사진 설명은 이렇다. “정의당이 23일 오후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연 ‘세월호 특조위 활동보장, 백남기 농민 청문회 시행 결의대회’에서 노회찬 원내대표가 규탄사를 하는 동안 세월호 유족이 눈가를 훔치고 있다.”
2016년 8월, 세월호 유족과 노회찬이 함께한 모습을 이정우 기자가 찍었다. 사진 설명은 이렇다. “정의당이 23일 오후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연 ‘세월호 특조위 활동보장, 백남기 농민 청문회 시행 결의대회’에서 노회찬 원내대표가 규탄사를 하는 동안 세월호 유족이 눈가를 훔치고 있다.”

내 마음에 분노와 슬픔이 밀려온 것은 다음 일화 때문이다. “황교안은 당시(2005년 삼성 엑스파일 수사 시기) 언론 브리핑 때 ‘경기고 동문들이 노회찬 욕을 많이 한다’는 말을 불쑥 꺼내기도 했다. 녹취록에 등장하는 검사들 중 상당수가 경기고 동문이었다. 당시 경기고 출신은 경북고와 함께 검찰 주류 중의 주류로 분류됐다.” <한겨레21>의 2018년 기사다. 황교안도 노회찬도 경기고 출신이었다. 이 사람들에게 노회찬은 어떤 존재였을까. 힘든 길만 골라 가는 이상한 사람이었을까? 엘리트끼리 나눠 먹던 이 나라에 천둥벌거숭이처럼 튀어나온 배신자였을까? 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2016년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노회찬의 모습이다. 2018년 7월 노회찬이 세상을 떠난 뒤 &lt;한겨레21&gt;은 “진보정당사에 남긴 노회찬의 족적, 그리고 노무현과 닮은점”이라는 채진원의 글을 실었다.
2016년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노회찬의 모습이다. 2018년 7월 노회찬이 세상을 떠난 뒤 <한겨레21>은 “진보정당사에 남긴 노회찬의 족적, 그리고 노무현과 닮은점”이라는 채진원의 글을 실었다.

‘삼성 엑스(X)파일’ 공개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을, 2014년 3월에 인터뷰잡지 &lt;나들&gt;이 만났다. “10년 전 ‘불판 교체론’으로 ‘전국구 이빨’의 명성을 얻었던 노회찬 전 의원과 삼겹살 불판을 사이에 두고 음주 인터뷰를 했다. 심각한 주제일수록 ‘빵’ 터뜨리는 그의 차진 입심도, 진보정치의 가치와 전략에 대한 신념도 여전했다.” 박승화 기자가 찍었다.
‘삼성 엑스(X)파일’ 공개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을, 2014년 3월에 인터뷰잡지 <나들>이 만났다. “10년 전 ‘불판 교체론’으로 ‘전국구 이빨’의 명성을 얻었던 노회찬 전 의원과 삼겹살 불판을 사이에 두고 음주 인터뷰를 했다. 심각한 주제일수록 ‘빵’ 터뜨리는 그의 차진 입심도, 진보정치의 가치와 전략에 대한 신념도 여전했다.” 박승화 기자가 찍었다.

▶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기획 팩트스토리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 실화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2017년 설립 이후 6편의 르포, 웹소설을 개발했고 2편이 영상 판권계약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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