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을 주도했던 예춘호 전 국회의원이 22일 새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아대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공화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6대에 이어 7대 총선에서 부산 영도에서 연거푸 당선해 당 사무총장과 국회 상공위원장을 지냈다. 1969년 문교부 장관 해임결의안에 찬성한 ‘4·8 항명 파동’과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제명당했다. 그는 이른바 ‘10월 유신’ 때도 정치권에서 가장 먼저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1978년 10대 총선에서 무소속 당선된 뒤 신민당에 입당해 야당 정치인으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1980년 서울의 봄 때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내란음모조작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최후진술에서 디제이(DJ) 구명을 호소했던 그는 훗날 이런 증언을 남겼다. “부산역에서 붙잡혀 끌려간 서울 남산의 중정 지하실에서 55일간 ‘내란음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디제이의 비서실장, 한국민주제도연구소 이사장으로 김대중 집권 때 과도내각의 총리를 맡기로 했다’는 것이 내게 씌워진 혐의였다. 조작된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면 돌아오는 건 매질이었다. ‘야, 이 ××야! 경상도 놈이 왜 전라도 놈을 돕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때 당한 폭행으로 고막이 상하고 눈 옆이 함몰됐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부의장을 맡았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하여 패배하자,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여 조순형·제정구·유인태 등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고 상임대표를 맡았으나 총선에서 원내교두보 확보에 실패하자 홀연히 정계를 떠났다. 그는 1974년부터 1987년까지 20여회 연행, 10여회 구류, 50여회 연금 등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정치범동지회장,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 영도육영회 이사장 등을 지냈고 서예와 낚시에도 일가를 이루어 많은 작품과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황치애씨와 아들 종석(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한양대 명예교수)·종홍(국민대 교수)·종영(전 가톨릭대 연구교수), 딸 종옥·지숙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6시30분이다. (02)3010-2000.
서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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